[서평]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허허당
나는 빛나는 한 지점을 보았다
[서평]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허허당)
아픔이란 건 불현 듯 엄습하기 마련이다. 아픔 없이 살아가는 사람 없고, 외로움 없이 견디는 사람 없을 거다. 나어린 내 눈에도 벌써 세상 삶이 이러할 것인데 구도자의 시선을 통한 세상이란 얼마만큼의 아픔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리어 우리는 구도자의 시선을 읽고 싶어진다. 결국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 따위의 괴로움을 직시하고 씻어내기 위하여.
그래서인지 서점 매대엔 참 많은 스님들의 책이 나와있다. 대부분 짧고 쉬운 경구를 통해 우리의 아픈 내면을 보듬는 내용이다. 사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책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한 책을 통해 삶을 깨닫는다기보다는 그저 살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연한 듯' 보이는 문구를 고급스러운 백지 위에 찍어내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도 해봤다. 스님들이 책장사를 위해 문자를 남발(?)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법정스님(1932~2010)의 열반과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선종 직후, 종교를 초월한 전국민적 애도의 물결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결국 아픔과 외로움 따위의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괴로움(苦)'의 소멸일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얼마가 '갈급'하는지 새삼 깨달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기억이 났다. 내가 방황하던 청소년기, 나를 붙잡아 준 책 두 권. <무소유>(1999)와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1994)이 말이다. 이 두 권의 책이 내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었던 건 의도하지 않았기에 분명한 인연이었을 것이다.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데, 그걸 유치하다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올해 새로 출간된 허허당 스님의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가 반갑다. 그리고 책을 펼쳐 본 순간, 무언가 다름을 알았다. 나는 차라리 이 책을 '화집(畫集)'이라고 부르고 싶다. 절반이 그림이기 때문이다. 모두 허허당 스님의 그림이라고 한다. 나는 문자보다 그림을 좋아하는 부류 중 하나다. 그림은 불립문자의 세계에 '좀 더'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자에 비해 그림은 나의 사고를 무한히 확대시킨다. 문자는 나를 변신시킬 수 없지만 그림을 날 뱀이 되게 하고 창공이 되게 하고 학이 되게 하고 숲이 되게 하고 여자가 되게 한다. 스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특히 책에 실린 소개에 의하면 스님은 "1978년 경남 남지 토굴에서 한 도반과 정진하던 중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붓을 잡"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 발원(發源)이 무의미한 듯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놀랍고도 신비로운 예술임이 틀림없다
나의 그림은
이 신비로운 생명 예술에 반응하며 춤추고 노래한 것이다
일체 생명의 자유와 아름다운 속에서(p.141)
그럴싸하다.
<그리움> p.44
1. 그립다
스님은 묻는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운 사람 하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지금 그대는 그런 사람 있는가?(p.40)
나, 그런 사람 있는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직 그립다 하기엔 과분할지도 모를 사람이다. 아직은 보고싶다, 정도로도 애틋해질 그런 사람이다. 너는 나에게로 왔고 나는 너에게로 갔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이별해야만 했을까.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 눈시울 밖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것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아픔이 싫어 도리어 냉냉해진 나였지만, 유치한 감정 이기지 못하고 흔들린 나였지만, 그마저 마음 안에서 굳어간다. 다만 나는 마지막에 이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했음이 아쉽다.
고통의 순간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사라진다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러워 또 다른 곳으로 피해 가면
거기 그만한 고통이 또 기다리고 있다(p.12)
<그리움>이라는 그림 속의 솟대처럼, 나는 떠날 듯 서있어야 했다. 수많은 동자승이 기원하는 가운데 오롯이 서 있는, 학을 닮은 솟대를 나는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날 기원하고 나는 그 기원 가운데에 서며 언제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난 이 세상을 떠날 수 없고 너는 나의 한 가운데에 묵직하게 머물었다 머물러야 했다. 네가 날 고통스럽게 할 지라도 내가 널 고통스럽게 할 지라도 난 머물러야 했다.
<생명의 노래>(p.68-69)
2. 나는 빛나는 한 지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생명의 노래>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빛났던 지점들에 관하여 생각했다. 나는 결국 저 수많은 무리 중에 하나일 뿐이지 않은가? 내가 주인공인 연극은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주인공과 관객이 일치하는 연극이라면, 그 연극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보았다. 저 수많은 무리 중에 나는 어느 찰라 너와 함께 빛난 적 있음을. 나는 언젠가 빛났던 한 순간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상한다. 저 수많은 무리가 일거에 별이 되는 순간을. 너와 나는 몇 광년일지 모를 거리로 떨어져 서로 빛날 것이다. 너와 나는 별이었다.
스님은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뼛속 깊이 사랑하면 아무 말도 못 한다(p.91)
나와 너는 말이 너무 많았고 그 말의 감옥에 갖혀 서로의 심연으로 완전히 들어서지 못 했다. 빛났던 지점들과 말이 난무했던 지점은 돌이켜 보건대 일치하지 않는다. 말이 지워진 자리가 그리워진다. 말이 없는 가운데에 이루어졌던 순간들도 있었으므로, 나는 그리워진다. 말이 없던 자리는 대개 내가 걷던 길에 있었다. 그 순간들이 소중하다. 미쳐 아끼지 못한 순간들.
그러나,
스님은 말한다.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p.11)
아무도 그대를 쫓는 것 없다
흘러라! 존재 그 자체로(p.125)
<허공에 심은 나무>(p.102)
3. 허공에 나무를 심지 마라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생이 나무라면 나는 어느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는가. 아니, 제대로 된 뿌리를 갖고 있기나 한가. 언젠가 나는 허공의 나무에 대해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 적이 있다. 수많은 공상과 환멸의 밤이 지속되었다. 나무는 하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 지리멸렬한 깨달음이 내 안에 가득 차올랐다. 나의 꿈도 그와 같았다. 허공에 암만 나무를 심어보아야 자라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훌륭한 나무를 원한다면 질 좋은 땅을 찾아야 한다.
스님의 말을 떠올린다.
무슨 일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하는 사람
입술을 깨물고 결심하는 사람
독해지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이들 대다수 뭔가를 이루어도 베풀 줄 모른다
주먹을 쥐었으면 펼 줄 알라(p.167)
무엇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건 여유일 거라고, 나는 미루어 생각한다. 여유가 없으니 각박해지고 남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혐오스러운 짓을 저지른다. 나는 허공에 나무를 심는 짓을 번복하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도 내가 가장 가까이에 두고, 내 신체를 의지한 땅을 내려다 보지 못 한 건 아니었는지. 너는 어디에 있느냐. 허공에 나무를 함께 심다, 겨우 땅을 함께 보았던 너는, 어디에 있느냐.
<아이폰 소녀>(p.132)
<생명의 축제 - 자(慈)>(p.184~185)
4. 생명의 축제를 벌이자. 숲으로 가자.
수많은 나무가, 인간의 형상을 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엔 아마도 아이폰 소녀가 살 것이다. 소녀의 마음엔 색색의 동자승이 담겨있다. 허공에 심지 말고, 토지에 심자. 우리는 저 아이폰 소녀들처럼 그 숲으로, 우리가 꿈꾸던 숲으로 각자 걸어들어갈 것이다. ■
<눈 깜짝할 새>(p.204)
추신. 위 그림을 보며. 114쪽 <오리가 되고 싶은 아이>와 뭐가 다른데? 결국 '제목'과 '그림'을 별 상관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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