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사각형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 피에타, 김기덕, 2012

고만하이 2012. 11. 4. 09:03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영화 <피에타> 리뷰

 

 

  • 피에타 작품요약 : 드라마 | 한국 |104분 | 2012.09.06
  • 피에타 감독 : 김기덕
  • 피에타 출연 : 조민수,이정진,우기홍,강은진
  • 피에타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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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외적인 요소는 의도적으로 배격될 필요가 있다.

      이 리뷰는 영화를 본위로 한다. , 영화 외적인 요소를 의식적으로 배격한다. 구조주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를 죽여야 한다.”(저자의 죽음, 1967)라고 한 바 있다. 옳은 지적이다. 이는 소설뿐만 아니라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 ‘한국 영화계의 부정적 현실등의 문제는 영화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필요한 요소-근작 중에 부러진 화살과 같은 경우는 이런 분석이 필요한 경우일 것이다-가 아니라면, 영화 밖에 있는 요소들은 감상에 있어서 배제 되어야 한다.

     

    <피에타>는 쉽다

     

    Director Kim Ki-duk’s ‘‘Pieta’’ wins the Golden Lion for best film at Venice

      혹자는 김기덕의 영화를 어렵다.”라고 단호히 평한다. 이는 매우 주관적 평가이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다거나, 옳다거나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나의 입장은 그러한 평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는 점이다.

      물론, 기왕의 김기덕 영화에 대해서는 나도 어렵다는 평에 대해 동의한다. 특히,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비몽>과 같은 영화들은 그 메시지를 포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메시지의 자리를 난해한 플롯이 채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반드시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기덕 영화에 익숙하고, 세심한 관객이라면 충분히 징후발견적 관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어려움을 느끼게 했을만한 영화였다.

      그러나 나는 이번 <피에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명백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는 심지어 메시지를 대사 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모두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자본주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이보다 정확하게 말하지만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구조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가족 단위 별로 혹은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이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칼날은 가차 없이 휘둘러진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무엇인가? 가족은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가?

     

     

     

      모든 일의 발단은 역시 돈이다. 고아하게 資本主義라고 쓰긴 하지만 풀이해보면 별 것 없다. “돈이 제일인 사상”. 천박하다. 인본주의(人本主義), 농본주의(農本主義) 따위의 말은 수긍이 가는 면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는 어색하고 불쾌한 감이 있다. 무엇을 으로 삼는 주의라는 것이 대개 그 무엇을 가장 한 것의 옥좌에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란 곧 자본이 곧 (선한) 권력이며 인품이며 평화라는 말일 것인데 이게 과연 타당한가? 물론 답은 생각하시는 바와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영화 속 강도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다. 그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난한 자를 갈취하는 자다. 억압하는 자다. 그 자체로 상징이다. 그렇다면 그저 가해자일 뿐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그 더러운 자본 앞에 조아렸을 뿐이다. 그리고 사용가치가 떨어지자 곧장 버려진다. 그뿐만 아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의 엄마에 의해 처절하게 복수까지 당한다. 피를 흘려야만 처절한 복수인가? 진짜 복수를 <피에타>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미선이 강도에게 복수하기 위해 건물 위에서 연기를 하다가 뛰어내리기 직전, 또 다른 피해자의 엄마(모두 엄마라는 점이 흥미롭다.)가 등장한다.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피해자에게 가해를 가하려고 하는 피해자다. 복잡하지 않은가? 문제는 미선이 그 노파에게는 가해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노파가 가진 복수의 칼날은 미선에게 뻗혀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가해자-피해자의 환 구조가 사실 논리적환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가해자가 아닐 수도, 피해자가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 그 이상한 구조를 조장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점.

      프롤로그에서 어떤 피해자가 자살한 장소에 강도는 찾아가 프롤로그의 장면을 오버랩하게 한다. 피해자의 자리에 가해자가 앉았다. 그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가족의 의미

      그 무시무시한 자본 앞에서 가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볼 여지를 영화는 만들어낸다.

     

    나 이 안으로 다시 들어가도 돼?

      자신을 30년만에 찾아와 내가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에게 보인 강도의 반응은 인상적이다. 첫째는 무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로 바뀐다. 그 분노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배치된다. “네가 내 엄마라고? (미선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내가 여기서 나왔다고? 여기서? 그럼 나 여기로 다시 들어가도 돼? ?” 그러나 이내 침대에 드러눕는다. 버려진 세월을 생각하면 피가 끓지만 또한 절실히 그리워하던 것도 엄마 아니던가. 그 대사에서 서러움이 읽힌다(물론 이정진의 연기는 많이 아쉽다). 물론 네가 엄마라면 이거() 먹어 봐.”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게 김기덕 영화다움이다. 김기덕 영화는 그 작위성들 때문에 독특함이 있다. 김기덕 영화 안에서의 작위는 그것 자체로 장치가 아닐까?

     

    중간에 등장한 불교의 의미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강도가 가짜 엄마를 찾아 나서면서 자신이 상해를 입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데, 그 중엔 스님’(정확히는 스님인지 암자에 단순히 기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스님으로 쓴다)이 된 피해자도 있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부분은 다름 아닌 담장이다. 스님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담장 너머를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쉽지 않다. 이때 등장한 강도는 휠체어를 번쩍 들어 스님에게 담장 밖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강도는 유유히 사라진다. 여기가 중요하다! 사실 그 담장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도 밖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낮은 담장이었다!

      이것은 김기덕 감독이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보여주었던 그만의 장치를 닮아있다. <봄여름~>에서도 스님은 나무배를 염력으로 밀고 끌어당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자체가 함의하는 바가 있다(물론 서사적 공백을 메우려는 의도도 있어 보이기는 했다). 낮은 담장을 높은 담장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화면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하필이면 불교적으로 제시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영화 안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맥락 상 유추는 해볼 수 있다.

     

    강도는 우리 모두의 화신이다

      높은 담장은 '강도'의 시선이다. 강도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의 화신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허덕이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시선 앞엔 언제나 높은 담장이 있다. 눈이 높다는 얘기다. 그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집착'이 될 수 있겠다. 구태여 집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님이 휠체어에 앉아있는 설정 역시 의도적이겠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시선은 선 사람의 시선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징이다. 승복을 입고 있는 것만 보아도, 집착을 내려놓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집착을 내려놓으니 담은 낮아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키리에 엘레이슨, 자비를 베푸소서!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강도(이정진 분)가 머무는 방의 창밖으로는 알렐루야는 영원하리라’()라는 문구와 붉은 레온사인 십자가’()가 반복해서 비춰진다. 의도적인 배치다. 청계천과 등장인물들의 비극적인 삶 등과 대비하여 일련의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오브제 이외에 영화 제목이 피에타인 것에 비하면 영화의 진행 내내 종교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도리어 중간에 불교가 등장한 것은 의뭉스럽긴 하지만 의도적인 배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키리에 엘레이슨'이 장엄하게 울려퍼진다. '키리에 엘레이슨'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누구에게 말인가? 자본주의 그 자체 아니었을까?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가?■

     

     

    모두 다 피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