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고만하이 2013. 1. 30. 08:19

 


야만인을 기다리며

저자
존 쿳시 지음
출판사
들녘 | 2003-09-0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존 쿳시 장편소설. 치안판사는 몇십 년 동안, 자그마한 변경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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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현종은 그의 시 「방문객」에서 말한 적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 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 시를 기억하며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이 '소설'을 통해 내게 온다면, 그 소설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또다시 생각한다. 그것 역시 어마어마한 일이다, 라고.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정현종의 「방문객」을 떠올린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나는 근 일주일 간 하나의 세계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소설책 한 권은 - 그것이 장편이든 중편이든 단편집이든 -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로서 나와 조우하며 일련의 아이러니를 체험하게 한다.

  제국의 변경에 있는 한 성의 치안판사인 '나'는 제국에 대해 분명히 '반골' 기질이 있고 그 자신도 그런 자신의 면모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제국이 갖는 편협한 자기 합리화와 존속에 대한 편집증적 열망을 들여다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주의자이다. 그는 끝없이 제국의 불합리성에 반항한다. 그러나 그 반항은 지극이 '내적'인 것이다.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충돌이다. 그는 야만인을 야만인이라고 부르지만 '제국이 규정한 야만인'을 믿지는 않는다.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다리가 다치고 눈이 먼 한 '청초한 소녀'를 만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전까지 품고 있던 제국에 대한 회의 그리고 야만인에 대한 '호기심', 심지어 자기자신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반성까지 이 모든 것이 뒤엉키면서 결국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그러나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제국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오늘날을 사는 내가 주위를 둘러보건대 '정의'를 외치는 사람 치고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포기하는 경우를 본 적 없다. 이른바 '진보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암암리에 자신이 반대하는 그 무엇에 협조하고 있음을 애써 부인한다. 반 체제적 예술을 하면서도 정부의 지원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칭) 보수당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면서도 협조한다. 이런 이율배반적 모습은 흔히 목격된다. 그런데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나'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깬다. 자신이 제국의 협조자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자에 의한 야만인에 대한 상상된 시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한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타자의 시선. 바로 그것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유심히 주목한 곳은 이러한 거시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내가 유심히 지켜본 것은 다름 아닌 '소녀'와 '나'의 관계였다. 사실 이 소설의 극적 반전은 이 '소녀'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모든 비극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소녀는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아만인'이다. '나'는 우연히 만난 이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빨려든다. 소녀는 '나'를 진실의 강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관념으로서 존재하던 그 문제의식이 핍진해진다. 사랑은 사람을 열렬하게 만든다. '나'는 소녀의 본질을 들여다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동정, 연민과 사랑이 동의어로서 자기 내면에서 융합 작용하고 있음을 들여다보며 그 전까지 무수한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낯선 감정에 대해 번민한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역사의 자취일까?"(p.110)

 

  어쩌면, '나'에게 '야만인'이란 '소녀'와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상상하는 야만인의 순수성이란 결국 '소녀'와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제국주의에 대한 협조자로서의 '나'가 갖는 시선의 한계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나'를 '소녀'에게 휩싸이게 한 원인이 무엇이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소녀'를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소녀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후천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상징적이다. 세상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그는 눈을 뜨고 있고 멀쩡한 육체를 갖고 있음에도 다 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소녀'를 사랑했다. 이 사랑이 종국에 파멸을 예고한다 할지라도, 그는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랑에 빠진 바보는 비웃음을 사지만, 결국 용서를 받는 법이다."(p.218)

 

  여기서의 '사랑'이란 비단 남녀 간의 그 무수한 그것을 지시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명'이 완전한 '타자'로서 상정하고 있는 '야만'에 대한, 그 본래의 순수성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겠다. 소녀가 가지고 있던 그 야만성 그러나 이따금 도리어 '문명'을 야만적이게 보이게 하던 그 무엇에 대한 연민과 갈망 말이다. '나'를 소용돌이 치게 만든 직접적 동인이 '소녀'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녀'의 의미를 확장되어야 한다. 그 상징성을 읽어야 한다(한 남자의 일생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역설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길거리에 난무하는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소멸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아무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p.245)

 

"나는 누구이길래,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그 환상에 야유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p.245)

 '나'란 비단 그 치안판사만을 의미할까. 나는 그 히스테리를 목격하면, 그저 망각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가지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