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잃어버렸던 큰 어른과의 만남
고 권정생 선생, 아동문학가, 1937-2007
도시라는 인공 공동체에 사는 우리는 늘 초조한 거 같다. 그런 심정은 알랭 드 보통의 말마따나 비교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한다(cf. <불안>). 비교의 기준은 어김 없이 물질이다(어차피 '도시'의 존재 근거가 '자본'아니던가?).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명예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 역시 그 끝단엔 물질이 서있다. 그러니 어른의 가치는 무시된다. 옛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했던 이유는 물질이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그 비가시적인 가치 때문이었다. 세월을 이겨내며 몸에 익힌 그 달관의 훈장 말이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우리는 이 훈장을 보지 못한다. 어른들은 괄시의 대상이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것이라면 모두 '구닥다리'로 몰리기 일쑤다. 그런 비뚫어진 시각은 갈등을 조장하고 악순환을 만들어내 다 알다시피 백해무익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는 내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참 어른의 시선이 느껴져서였는지 모르겠다.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등 이른바 '사회의 큰 어른' 혹은 '큰 스승'으로 불렸던 분들이 소천하시고 남은 이 땅에 나는 버려진 어린 양이 아니었나.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어린 양이었음을 깨달았다. 제목이 비록 <우리들의 하느님>으로 한 제도권 종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는 하지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간증 도서'가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정증보판에 부쳐"에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씨가 밝혔듯이 선생이 본래 원하신 제목이 '태기네 암소 눈물'이었기도 하거니와 평생 권정생 선생님 당신의 신앙으로 삼았던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도 따끔한 쓴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결국 <녹색평론> 편집실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권정생 선생이 이 책의 출간에 동의하였을 때, 선생님이 제안한 책의 제목은 '태기네 암소 눈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님의 뜻을 어기고 <우리들의 하느님>을 제목으로 결정했다. (중략) 다른 저자 같았으면 심히 불쾌감을 느꼈을 것인데, 선생님은 거기에 대해서 나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대인(大人)이었다."(p.5)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은 다음의 천국보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기 이전에,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지 못하고 참되게 죽지 못했다면, 그의 동정녀 탄생이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지금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는 것도, 모두가 값어치 없는 일이다."(p.48)
약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약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지나치게 가혹하지는 않은가?
위의 두 번째 이용문과 관련하여 기억 나는 기사가 하나 있다. 중앙일보에서는 <교황 "동성애는 죄, 하지만 게이도 형제>(13년 7월 30일)라고 헤드라인을 붙인 기사였다. 교황이 브라질 방문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동성애나 이혼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이다. 이것을 두고 많은 네티즌들 특히 소위 '개신교 성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맹비난을 하고 나섰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하고 있는데 교황이 그걸 '허용'해도 되냐는 것이다.
교황의 발언의 핵심을 짚지 못한 거다. 이런 무식한 비난은 편향된 사고로 편향된 시각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을 되씹어 보자. "우리가 믿는 것은 (중략)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신이다." "참되게 살"다 간 예수가 남긴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사랑'이었다. 예수는 그걸 몸으로 보여줬다. 창녀, 어부 등 천대 받던 이들과 어울렸다. 그건 그 스스로 설하던 '사랑'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의 소리없는 실천이었다. 그게 형식적인 '율법'보다도 중요하다던 파격적 가르침이었다.
되짚어보자. 동성애자와 이혼자는 대개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해진 경우가 많다. 동성애자는 대부분 선천적 성정체성의 문제 때문이고 이혼자도 자기가 좋아서 이혼자의 꼬리표를 스스로 다는 경우가 어디 많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사정에 비해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냉정하기만 하다. 그 옛날 유대인들이 한 집단을 차별하던 그 시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나 이혼자는 명백한 '약자'다. 그들이 행하거나 행한 일이 설혹 율법에서 어긋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에 앞서 그들은 약자인 거다. '율법'보다 앞서 중요한 것이 '약자에 대한 사랑'이라 하지 않았나? 왜 예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만이 천국 열쇠를 쥘 수 있다고 했나? 혹, 차별의 시선이 없기 때문 아닌가?
교황이 한 발언의 핵심은 바로 이거다.
그들의 굴레는 안다. 그러나 대개 어쩔 수 없이 지게 된 굴레로 인해 그들은 벅차게 살아간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약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거지와 친구가 되자면 거지가 되어야 하고, 과부 사정은 동무과부가 가장 잘 안다. 훌륭한 사람이란 바로 상대와 제일 가깝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상대는 바로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있는 나의 이웃들이다."(p.52)
유대민족의 원수 로마 군대의 군인 백부장의 아픈 부하를 고쳐준 예수의 일화를 예로 들며 선생은 이렇게 쓴다.
"예수는 너그럽다. 적어도 인간의 목숨에 대한 소중함은 국적도 종교도 이념도 초월한 사랑에 있다. 이것이 기독교다."(p.56)
"포도주는 곧 피이며 빵은 살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가장 단순한 체험적 가르침인데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 못했다. (중략) 반대로 한 덩어리의 빵을 곧 나의 살이며 나의 목숨이며 내 이웃의 목숨으로 깨달을 때 온 세계는 적이 없어질 것이다."(p.67)
"일본 도쿄 시부야의 좁은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 세상에 빈민(貧民)이란 말만큼 성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마음대로 쳐다본다.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빈민들이 살던 골목길엔 국경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다."(p.157)
진실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안주하는 시선들에 대해
Jealousy, Munch
"까마귀는 까마귀대로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고 공작새의 깃털만 부러워한 것이 큰 잘못이다. 사물을 바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남의 겉모습만 보고 괜히 부러워하는 못난이가 된다. 열등감은 이런 잘못된 허영심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p.91)
살며,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다보면 구태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란 본래 소통이고 나보단 상대를 기준으로 교환되는 어떤 가치인데 그걸 무시하는 형태로 목격되곤 한다. 자신을 구태여 특히 말로서 내세우려는 사람이나 남을 헐뜯는 사람, 비꼬는 사람 등은 결국 모두 열등감 때문일 거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상대의 내실을 간파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겉보다는 바깥만을 보고 '화려한 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불안>에서 Snobbery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즉, 속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권정생 선생의 말마따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뭉크의 <질투>를 떠올렸다. 그림의 좌편에 큼지막히 자리 잡은 남자(뭉크 자신은 아닐까 생각해본다)가 있고 우편에 한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서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상황은 충분히 상상할만 하다. 좌편의 남자가 우편의 여자를 짝사랑하는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랑 정다운 모습을 질투하는 그 언저리의 상황을 말이다. 스탕달은 자신의 저서 <연애론>에서 남녀간의 애정지사에 대해 생생하고 면밀한 분석을 해놓은 적 있다. 당연히 질투에 대한 부분도 있는데, 역시 질투하는 쪽의 남자가 아닌 쪽의 남자를 공격하고 헐뜯기 마련이라 설명한 바 있다(정확한 인용문은 아니다. 그러나 요지를 이렇다.). 모두 자기애의 부족이고 열등감의 현현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그 개인 하나하나를 나무랄 수 있을까?
"사람 마음이 넉넉하자면 도량형의 눈금부터 넉넉해져야 한다. 요즘같이 1만분의 1밀리까지 계산해내는 세상에 인심인들 얼마나 각박하겠는가? 손대중 눈대중으로는 절대 핵폭탄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p.94)
그래, 없다. 그들의 탓이 아니다. 사람을 도량형으로 만들고 각박해져버린 세상 탓이라는 것이 옳다. 비인간적 비교는 지양해야 한다.
"황금만능주의의 세상은 이렇게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p.95)
결국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쟁만 하다가 지쳐 쓰러지면 그것이 곧 죽음인 것이다."(p.127)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뭉크, 골고타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
"(전략)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두 형제는 다시 이전처럼 가난한 나무꾼으로 돌아가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세상에 수만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이야기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가?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도 그렇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책 66권도 결국은 가난한 나무꾼 형제처럼 살라는 가르침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p.165)
"2백 년 전 프랑스 청년 루소는 모든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옛날 2천 년 전에 예수는 사람들이 거듭나 들의 나리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 그 이전에 중국의 노자와 장자도, 인도의 석가모니도 인간의 문명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한사코 그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p.180)
나는 결국 권정생 선생의 이 책 <우리들의 하느님>이 우리들의 근본적 화두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인용한 구절들은 이 책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책은 도끼다>의 저자 광고인 박웅현의 말처럼 "이 책에 대한 구매욕구"를 자극할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그만큼 한 장 한 장이 주옥 같다. 이 책을 기왕에 읽었거나 미래 읽을 독자들 중에는 "선생이 좀 이상적인 얘기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지 않은가?"라고 말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지 않나? 그게 우리에게 권정생 선생 같은 스승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개는 개로 키워져 개로 살아야 하고, 닭은 닭으로 키워져 닭으로 살아야 하듯이, 사람도 사람으로 키워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훌륭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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