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황홀하고, 기묘하며, 두려운 것 - World's End Girlfriend, <Seven Idiot>
1. 일본의 1인 밴드 <World's End Girlfriend(이하, WEG)>(본명 카츠히코 마에다 前田勝彦)를 처음 안 것은, 김연수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분명하게, 책의 제목을 WEG에서 따왔노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물론, 제목 뿐이었다. 정작 글을 쓰며 김연수 작가의 귓등에 고인 음악은 WEG가 아니라, 스페인 밴드 라 부에나 비다(La Buena Vida)의 ‘La Mitad De Nuestras Vidas’였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면, WEG는 김연수 작가에게 이용 당한 것이다! 좋은 이름은 뺏기고 자신의 곡을 소설 속에 녹일 기회는 박탈되었다. 그렇다고 김연수 작가를 미워하지 말자. 내가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분이니까. 덧붙이자면, WEG의 'All Imperfect Love Song'이 소설을 쓰는 동안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정식으로 발간된 소설집에서가 아니라, '블로그'에서.)
* 일독권장 - 김연수 소설
2. 자,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음악' 그 자체와는 상관 없는 별개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오해하실까봐 부연설명을 하는데, 음악은 소설의 하위개념이 아니고 그 역도 역시 진실이 아니다. 음악과 소설은 '김연수 작가'의 경우처럼 필연적으로 상호교류의 관계를 맺으면서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당연한 말이다. 구태여 부연설명한 건, 앞서 말했듯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A. 逆<신곡>의 테마 - 1번 트랙의 비밀
1. 기왕의 권위를 뒤짚는다는 건, 분명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거꾸로' 세워놓는다던가, 광화문의 현판을 떼어내고 다른 것으로 갈음한다던가, 하는 행위들. 특히, 그런 행위들이 '예술'의 범주 안에서 행해졌다면 그것의 '불순한(!) 의도'는 더욱 뚜렷해진다. 예술 안에서의 전복은, 예술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순수예술이 본연의 미학 달성을 위해 '영원히' 추구해야 할-추구 할-도구이기 때문이다. 예술 안의 전복은 단순히 엄마가 설거지한 후에 그릇을 건조대 위에 '뒤짚어놓는' 행위와는 다르다. 엄마의 행위가 따분하고도 진부한 '일상'적 모습이라면, 예술 속의 '전복'은 언제나 파격이고 일탈이며 그래서 '비일상'적이기 때문이다.
2. 첫 곡, <The Divine Comedy Reverse>는 이러한 역설은 분명한 '기표'로써 드러내놓았다. 'The Divine Comedy'는 다들 떠올리셨다시피 '단테'의 '신곡'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는 그 뒤에 있다. 다름 아닌,
Reverse!
Reverse! 역! 거꾸로! 그래, 이 앨범의 첫 곡은 이 앨범의 방향성과 목적, 의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치, '모범답안'처럼 쉽게, 아주 가시적으로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2-1.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순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다(못 읽어보셨다면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단테가 직접 지옥을 거쳐, 연옥, 천국을 순서대로 체험하며 종국에는 '광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느끼셨겠지만, 굉장히 '종교적 색채'가 짙다. (참고로,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한다.) 연옥에 대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논쟁은 피하도록 하자.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순서이기 때문이다. '지옥'->'천국'이라는 구조는, '구원'을 상징한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는 주인공 단테가 '하느님(광명)을 만나는 환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느님의 권능과 환희, 구원의 신비를 작품으로 형상화해놓은 것이다.
2-2. 그러나, WEG는 아주 과감하게, 이 구조를 'Reverse'했다. 즉, WEG의 앨범 속에서 '신곡'은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구원'의 순리가 아니라,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르는 '파국'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원작 '신곡'의 구조는 더할나위 없는 환희일 것이다. 그러나, '(WEG) 음악적인 테두리' 안에서 '구원'과 '종교'는 케케묵은 '꼰대들의 관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일탈'을 '예술'의 본질이라 할 때, WEG는 그 의미에 충실한 것이다.
2-3. 그렇다고 해서, WEG의 의도가 진리는 아니다. 외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자체가 오히려 구태의연하기에, 단연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순전히 듣는 것'에만 그 의도에 대한 평가를 한정한다면, (분명히 내겐 심장이 두근거리는 충격이었기에) 훌륭했다, 목적이 성공했다, 라고 평가한다. 逆! 그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
B. Part1. '천국'
1. 두 번째 곡, <Les Enfants du Paradis>(7:29)는 '천국'의 파트이다. 우선, 유투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를 보자.
어때, 천국이 느껴지는가? 글쎄, 나는 그 천국을 느끼기에 앞서 한가지 놀라운 경험을 소개할까 한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대개 음악에 전신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음악이 나오면 되는대로 몸을 놓아둔다. 그렇다고 춤실력이 대단한 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벗어난 나만의 공간에서 음악과의 혼연일체를 꿈꾸며 나를 놓는 것이다. WEG의 음악은 그런 '의식'을 치르기에 충분한 곡이었으니까.
퇴근 후 이 앨범을 받아들자마자, 플레이어에 CD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악은 맘에 들었고, 심지어 나는 방안의 모든 불을 소등하고 몸을 지척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연옥' 파트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수십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지옥'파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아 불을 켜고 정좌하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그 춤의 경험이다. 이 포스트를 쓰기 위해 찾아 본 뮤직비디오는 나의 춤과 동일했던 것이다. 별 것 아니라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저 여자 역시 나처럼 아무런 격식도 없이, 다만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몸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공감대. 같은 음악을 전혀 다른 시공의 여자와 공유할 수 있다는 그 알싸한 쾌감. 그래 그런 경험이었다.
각설하고- 천국을 느끼셨는가? 혹, 이 곡에서 천국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후반부에 있을 '지옥' 파트를 경험한 후에라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이다. 저 유려하게, 온몸을 음악에 맡긴 채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2. <Les Enfants du Paradis>라는 곡의 제목은 마르셀 까르네 감독(프랑스)의 1945년 작 <천국의 아이들(Les Enfants Du Paradis)>에서 가져왔다. 아래는 기 영화의 포스터이다.
C. Part2. '연옥'
1. 자, 트랙은 혼란스런 내 영혼을 싣고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제 '연옥' 파트다.
2. '연옥'에 해당되는 대표곡은, 8~10트랙에 담긴 <Bohemian Purgatory> 3부작이다.
3. 음악의 도입부에 들어서자마자, 오르간 연주가 낮게 깔린 안개처럼 아무런 소리 없이 빈 공간들을 채운다. 환희도, 절망도 아닌 그 중간의 애매한 공간. 그 연옥의 이미지가 안개처럼 내가 앉은 공간을 차오른다. 실제의 연옥은 이런 공간일까? 내가 아는 연옥은 지옥과 천국의 중간, 끝없는 보속과 예수님,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통공의 구원이 내리는 곳. 천국은 아니지만 지옥도 아닌 곳. 그러나 지옥과는 달리 끝없는 구원의 가능성이 만연한 곳. 절박한 기도. 구원을 향한 끝간데 없는 갈망. 그 반대편에 선 끝없는 악마의 낯짝. 그 그림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기도.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4. 예상하다시피, 보속 받지 못한 자, 선택 받지 못 한 자들의 루트다. 이 앨범의 여정은.
악마의 형상이, 보이는가?
D. Part3. '지옥'
1. 드디어 클라이맥스
2. '지옥' 파트에 해당하는 곡은 11~12번 트랙이다. 11번 트랙은 <Der Spiegel im Spiegel im Spiegel>이다. 현대음악의 거장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에서 차용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을 통해 알려진 곡이도 하다.
3. <Der Spiegel im Spiegel im Spiegel> 초반부 미니멀한 건반 소리는 패르트의 음악과 닮은 점이 있다.
4. '지옥' part의 정점은 뭐니뭐니 해도 12번 트랙<The Offering Infemo>이다. 이곡은 음표의 자리를 '비명'이 대신한다. 온갖 비명들이 혼재되어 마치 뒤집어놓은 삼각뿔처럼 무진장 상승하는 혼란의 엔트로피! 죄송스럽게도, 나는 이 혼란의 엔트로피를 이기지 못하고 음악을 도중에 꺼버렸다. 현기증이 났다. 정말이지, 구토 증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음악의 탓이기도 하거니와 초반 트랙에서 지나치게 몸을 흔든 까닭도 있을지 모르겠다.
E. Part4. 혼란의 전복
1.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예술은 전복'이라고 했다(먹는 전복 아니다). 현실에 적용해보자. 중력이 하늘에 있고, 세상은 뒤집어지며 혈액은 거꾸로 흐른다. 아마, 현기증 정도가 아니라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복은 어느 한계에 도달할 때 그쳐야 한다.
2. 바로 마지막 13번 트랙<Unfinished Finale Shed>는 전복의 한계를 인정한 듯 더할 나위 없는 평온 속으로 입장한다. 그야말로 전복의 전복이 아닌가?
F. 이 앨범에 실린 모든 트랙
1.The Divine Comedy Reverse
2.Les Enfants du Paradis
3.TEEN AGE ZIGGY
4.DECALOGUE minus 8
5.ULYSSES GAZER
6.Helter Skelter Cha-Cha-Cha
7.GALAXY KID 666
8.Bohemian Purgatory Part.1
9.Bohemian Purgatory Part.2
10.Bohemian Purgatory Part.3
11.Der Spiegel im Spiegel im Spiegel
12.The Offering Inferno
13.unfinished finale shed
■('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