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살바도르 달리

고만하이 2012. 4. 10. 00:16

엄마 뱃속을 기억하는 한 예술가의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이름이 낯설지라도,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다다이즘에 뿌리를 둔 이 미술사조는 여타의 이론적 설명을 곁드리지 않더라도 대강의 인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환상이고 몽환이며 기괴할 것이다. 1989년에 세상을 떠난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였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1904-1989)

 

그는 그 스스로 '자서전'을 썼는데-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서전'은 자신의 쓰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반대가 상식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는 지금껏 세상에 발표되어 온 어느 자서전과 비교해도 유별난 점이 있다. 달리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이 포스트에서는 이마고의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를 텍스트로 사용했다.)

 

"이런 유형의 자서전으로는 틀림없이 세계문학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이다."(p.55)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의 자서전을 '문학' 부류에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 인용문을 돌이켜 보자. 달리는 "세계 자서전 역사 상" 따위가 아니라 분명히 "세계문학 사상"이라고 읊조린다. 위 문장만으로도 그의 자서전이 어떻게 진술될 것인지 가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교만할 것이라는 예감도 들 것이다. 자신의 자서전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리는 자가 겸손이나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리의 표현이 옳았다. 그의 자서전은 일종의 아니 그 자체의 '문학'이었다.

 

 

 

달리는 심지어 자신이 태아 적 시절을 기억한다고 주장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시절을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또렷한 기억에 대해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지궁 속의 낙원은 지옥의 불처럼 빨강, 주황, 노랑과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고 물렁물렁, 따뜻하고 대칭적이며 끈끈하고 이중적인, 움직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다." 또 "내가 거기서 보았던 것 중에 가장 휘황찬란한 것은 둥둥 떠다니는 알 두개였다. 이후, 환상적인 계란의 이미지 앞에서 내가 평생 동안 느꼈던 동요와 감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며 "모든 쾌락과 꿈 같은 동화들은 이미 이 시기에 나의 두 눈 속으로 숨어들어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초현실주의 작품 여로가 결국 태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구태여 사실 확인을 할 필요는 없을 뿐더러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 자신의 말이 유일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보통의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서전 속의 진술은 시종일관 지극히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몽환적이다. 그러나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괴짜의 진술을 중간에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지극히 괴짜다운 가운데에 지극이 '이성'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티 원자폭탄 투하의 형상이 아니라 기실

그의 머리의 실체가 아닐까?

 

그가 프로이트를 갈구하고 자크 라캉 등과 교류하는 모습들에서 그의 모습이 그저 '미치광이'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그가 자신의 무의식과 의식 등에 관하여 프로이트적 방법론으로 분석하는 장면 등은 그가 그저 한낯 미치광이가 아님을 알게 한다.

 

"아버지가 트라이테르 선생님 같은 괴짜 선생이 있는 학교를 내게 골라준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히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 교육을 수도사들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를 공립학교에 넣기로 단호히 결심했고, 이 결정은 아버지 주변에서 정말이지 괴짜짓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피게라스의 가장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1학년을 다녔는데 이 점은 나의 타고난 과대망상적 성향의 발달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모든 실용적 행위는 나의 적이 되어갔고, 시간을 거듭할수록 외부 세계의 오브제들이 내겐 공포의 대상이 되어갔다."(p.67)

 

자서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에 대한 편견-이기적, 광기 등-은 다소간 사그라진다. 그는 어쩌면 불쌍한 인간이었고, 사랑 받고 싶었고, 또래와 자연스레 어울려 노는 것을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화풍을 결정하기 이전에 프로이트를 갈구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까닭인지도 모른다. 자신 조차 다 알 수 없는 자신에 관하여 그 지극한 광기와 천재성에 관하여 고뇌하였는지 모른다. 그는 프로이트를 통해 얼마간의 답을 찾았을 것이고, 그것을 증오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증오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한껏 천재성을 발휘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아버지가 괴짜 기질이 없었다면 달리는 천재성을 일찌감치 꺾였을지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나는 1929년부터 나의 천재성을 명백히 자각했다."

 

그의 심리적 안정에 '갈라'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의 자서전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위대히 빛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프로이트, 피카소, 엘뤼아르, 로르카, 그리고 천재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들 등이 말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이다. 어떤 결백증인 것처럼 달리의 자서전은 '여성'에 관한한 백지에 가까워진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은 하나 같이 아래의 그림처럼, 난로 옆의 치즈처럼, 흐늘거리고 녹아내리는 오브제들의 모습들이다. 

 

 

폭발하는 라파엘의 머리, 1951

 

그러나 갈라의 경우는 예외인 것 같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한 여자이고, 분명한 존재였던 것 같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다면, 달리에게는 갈라가 있었다고 할까. 갈라는 무의식 그곳에서마저 저 밑바닥을 부유하는 달리에게 안식처이자, 열쇠이며, 하늘과 땅이며 목적이었으며, 동력이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해맑은 하늘처럼, 나는 파리에서 앓고 난 뒤 가장 '투명한' 건강시대를 보내다. 왜 '투명한'이라 했는가 하면, 말 그대로 나는 다시 피어나는 내 신체구조의 모든 소소한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기능하는 것을 내 몸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호했던 예감이 내 육체 안에서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건강한 것은 사랑을 예고하는 내장의 전조였던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사랑을 알게 된다. 나는 벌써 어떤 '부재'. 아주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어떤 여성적 형상의 부재를 손으로 만지는 것 같았다. 그 형상은 여성의 육체로 다시 태어난 갈루추카일 수밖에 없었다."(p.263)

 

그 '갈루추카'란 다름 아닌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였"다.(p.272) 둘이 처음 만났을 이미 갈라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다. 10년 연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바로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둘은 만난지 수십 년 후 엘뤼아르가 사망하자, 교회에서 인정하는 정식 부부가 되었다(엘뤼아르가 사망하기 전에 갈라는 그와 이혼했다. 달리와 만난지 3년만이었다). 갈라는 달리라는 남자를 만나 지상에 발을 딛을 것 같지 않는 천재를 지상의 천재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바친다. 갈라를 만나기 전의 달리와 그녀를 만난 후의 달리는 달랐다. 달리의 사랑은 유아적이고 맹목적이었다. 갈라가 병원에 입원하자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의사의 가운에 매달려 울부짖어 초현실주의 그룹 전체를 놀라게 했다. 갈라가 병상에서 일어나자 달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겠군!” 이후 그의 그림 속에 그려지는 여성은 대개 아내 갈라를 모델로 삼았다.

 

 

 

 

아내 갈라는 달리에게 유일한 비너스이자, 성모 마리아였다.

 

 

예술가는 고독하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타당하다. 그것은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저 흑백사진을 보라. 그의 얼굴에서 고독이 느껴지는가? 그 고독에서 오는 불안이 느껴지는가? 그는 지극히 행복한 것이다. 달리는 자신의 예술혼 앞에 온전히 투신하여 헌신하는 달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작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엘뤼아르의 심정은 어떠하였는가?

 

* 덧붙여 : 나는 이 자서전을 완전히 읽지 못 했다. 이 점은 분명하다. 위에 쓴 글은 허구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