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영화 때문에 운명론자가 되었다 - <클래식>, 2004
8년만에 본 영화 <클래식>, 다행과 불행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영화 <클래식>을 보았느냐, 하고. 그때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했다. 구미가 당기는 영화 제목이 아니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화를 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마치 꼭 보기라도 해야 하는, 운명의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2004년에 개봉한 영화니까, 딱 8년만에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불행한 일일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까닭은 내가 여태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생이란 수수께끼의 열쇠와도 같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야만 보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삶의 지평은 넓어지고 유치하고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의미를 품고 내게로 찾아온다. 영화 <클래식>은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비밀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 속의 대사, 장면, 소리 등이 모두 유치하고 작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까닭은 내가 좀 더 일찍 사랑이란 열쇠를 가늠해 볼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2004년, 이면 8년 전. 내가 지금보다도 8살이나 어리던 때였으니 말이다. 그 사랑이란 것이 꼭 연애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선망'이다. 난 한동안 그 선망조차 품어보지 못한 채 퍽퍽한 인생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2세에 의해 이루어진다.
영화의 서사는 단단하고 완결되어 있다. 아주 작은 요소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챙겨 관객을 설득시킨다. 다만 소위 비평가들에 의해 '사랑'이란 소재의 진부성이 문제시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란 진부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인 것 아닐까? 사랑엔 과거란 없다. 사랑은 언제나 남이 아닌 '내'가 하는 것이므로 역사화될 수 없고 지치지 않는다. 사랑이란 언제나 '현재'의 역사이니, 영화에서 무수히 다뤄진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그러나 나는 <클래식>을 평하며 모든 지식을 내려놓고 싶다. 단지 오준하(조승우 분)와 성주희(손예진 분), 그 둘의 사랑과 그들의 2세가 맺는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오준하와 성주희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순수하다. 요즘 고등학생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다. 조승우와 손예진의 연기에 감탄한 것도, 그 순수함을 이질적이지 않게 연기해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투명하리만큼 순수하고 그 자체만으로 바라보는 이를 감동하게 한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 사랑, 그들의 2세에 의해 이루어진다. 영화는 이 운명을 그리기 위해 쉴 새 없이 요소요소가 엮여든다. 과거와 현재의 사랑이 교차하고 준하와 태준의 우정이 교차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시공간이 모두 엮여든다. 준하와 주희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그 2세에 의해 그들의 못 다 이룬 사랑은 이루어진다.
사랑은 본래 그런 것이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수 천 억겁의 시간과 드넓은 우주의 한 지점이 교차하는 순간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를 교차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로운 일이다. 삶과 삶이,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순간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준하와 주희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사랑했다. 바로, 시간과 공간이 열렬히 그들에게 반응했던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육신이 설혹 사그라진다 한들 우주와 시간이 그 사랑을 잊을까? 2세에게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작위가 아니다. 그건 사랑의 본질이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이다.
운명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었는데,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운명이 있다고 믿게 된 사람 중 하나다. 이건 사울이 바오로가 되는 그 회심의 역사만큼이나 기적적인 것이다. 다시 보고픈 영화다. 아직도 보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꼭 한 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