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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사각형/끝날 것 같지 않은 계획

[스크랩]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이 바뀔까(한겨레 칼럼, 정여울)

6월 2일 자 한겨레 신문 16면에 실린 칼럼입니다.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이 바뀔까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2012.06.01

 

볼 때마다 가슴 설레는 그림이 있다. 페르메이르(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1659)이 그렇다. 창가 햇살을 등불 삼아 편지를 읽는 그녀의 발그레한 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이 순간, 마치 세상에는 편지 한 장과 그녀밖에 없는 듯하다. 기이한 열패감과 맹렬한 질투심이 한꺼번에 끓어올랐다. 나는 결코 그녀가 읽는 편지의 은밀한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주를 저 좁다란 편지에 압축한 듯, 그녀는 전존재를 편지 한 장에 집중하고 있다.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뛰는 심장, 단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붉어지는 볼. 이 그림은 생애 한 번뿐인 첫사랑의 복잡한 무늬를 고스란히 떠낸 영혼의 데칼코마니 같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상상이다. 그림의 발신인 페르메이르조차도 나 같은 수신

인의 반응을 계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 또한 ‘수취인 불명’의 편지와 같아서, 발신자는 수신자의 반응을 예견할 수 없다. 창조적 오독은 이런 순간 탄생한다.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정체불명의 수신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모험이야말로 저자의 운명이라 했다. 예술가들이 느끼는 창조의 설렘도 바로 이 모험 때문에 가능하다. 슬로터다이크는 저자라는 발신자와 독자라는 수신자의 관계를 에로스의 논리로 바라본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가설적 우애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를 향한 사랑’을 뜻한다는 것이다. 학문이란 글을 통해 생면부지 타인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 아닐까.

책 쓰는 일뿐 아니라 책 고르는 일도 일종의 내밀한 연애 사업이다. 채팅만으로 짝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광고만 보고 책을 사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책과의 만남 또한 오프라인 미팅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루어진다. 책을 만지고, 책에 줄 치고,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책의 질감과 냄새, 온도에 반응하며 친밀감을 쌓는다. 손가락의 예민한 촉각이야말로 이러한 ‘책의 페티시즘’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디어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한참 동안 책과 상견례를 치른 뒤에야 간신히 마음에 드는 한두 권을 골라낼 수 있다. 나는 “무슨 책을 추천하세요?”라는 익숙한 질문에 당황한다. 모든 이에게 맞는 책이란 없기 때문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질문의 주인공과 함께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르고 싶다. 그냥 들르는 정도가 아니라 며칠 동안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괜스레 어슬렁거릴 필요가 있다. 그 서성임, 머뭇거림, 두리번거림, 만지작거림 속에서 책과의 진짜 ‘사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뜻밖의 독자 편지를 받았다. 감옥에서 온 편지였다. 편지를 뜯는 손가락이 떨렸다. 나 또한 한 사람의 저자, 수신인을 예상치 못한 발신인이었던 것이다. 복역중인 청년의 정성스런 손글씨에서, 오랜 망설임과 불면의 밤과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읽었다. 그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너무 아파, 한참을 망설이다 이렇게 답장이 늦어졌다. 인생을 확 바꾸는 책은 없지만, 인생을 확 바꾸는 절실한 물음은 있다고. 당신이 그 질문을 시작한 그 순간, 인생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고. 머리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채 연못을 찾는 심정으로, 내게 맞는 책을 찾는다면, 내게 전혀 안 맞는 책조차 커다란 스승이 된다고.

연인의 프러포즈 반지를 고르는 마음으로 책을 고른다면, 책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어엿한 ‘셀프’ 인문학 강좌다. 명문대학 필독서 목록에도, 유명인사의 서재 컬렉션에도 기죽을 필요 없다. 하버드대 추천 도서목록 등을 주섬주섬 뒤지다가 번뜩 깨달았다. 이렇게 평생 ‘타인의 목록’만 넘보다가는, 결코 나만의 ‘마음속 서재’를 만들 수 없겠구나. 이제 나는 광고나 목차를 보며 책을 상상하지 않는다. 무조건 부딪힌다. 낯선 책을 쓰다듬고 매만지며, 은밀하고 에로틱한 독서의 페티시즘을 즐긴다. 창작이란 이름 모를 독자,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독자를 향한 애틋한 구애의 몸짓이기에. 글이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357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