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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외딴방, 신경숙

 


외딴방

저자
신경숙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1999-12-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1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자전적 장편소설.한 외로운 영혼의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외딴방의 거울 탈출하기
(여성)작가 혹은 (여성)화자의 자기 발견적 글쓰기에 대하여

 

 Ⅰ. 들어가며 – 여성작가의 여성화자를 통한 글쓰기에 관하여
  1990년대 초반의 한국소설을 뭉뚱그리는 말 중 가장 범박한 것이 ‘여류소설’이다. ‘여류문학’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여류소설’은 협의에서는 글자 그대로 ‘여류작가의 소설’을 지칭하는 말이며, 1920~30년대 최초의 근대적 여성문학가(지식인)(김명숙, 나혜석, 강경애 등의 작가가 있다.)가 등장한 이래 명맥을 유지해온 말이다.(1990년대 초반 이후, ‘여류문학’이라는 말은 사라진 듯하다. 아마도 ‘여류’라는 말 속에 숨은 차별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여류’는 ‘여성’을 특정하고 특수한 집단으로 한정 짓고 ‘비주류’에 감금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 문단을 지배하였던 거시담론 중심의 리얼리즘에서 미시담론 중심의 리얼리즘으로 문학 담론의 장이 변화하였다. 이것은 곧 1990년대 초반의 문학이 “기존 리얼리즘 문학에서 경시해온 개인적 실존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천착이 스며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중심에는 남성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였던 1980년대까지의 상황과 대척을 이루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척점’이 바로 ‘여성문학’일 것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문학 내부에 있어서도 ‘부권’의 이미지는 막강하였다. 문학의 창작과 비평은 모두 남성의 것으로, 이를 빗대어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펜은 페니스”(『다락방의 미친 여자』, 수전 구바․산드라 길버트, p.63, 이후, 2009)이라고까지 하였다. 19세기 시인 중 가장 독창적인 시를 썼다고 평가 받는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1886년 친구 딕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장인적인 솜씨다. 이것은 일종의 남성적인 재능이며, 특히 남자를 여자와 구분해 주는 것이다. 종이에 생각을 낳는 것, 운문이나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생각을 낳는 일은 남성적인 재능이다.”


  이는 문학적 부권의 상징이다. 문학은 곧 부권이었으며,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페미니즘 문학 연구의 선구자 수전 구바(Susan Gubar)와 산드라 길버트(Sandra M. Gilbert)는 그들의 공동 저서『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위에서 언급했지만 재차 인용하자면) “펜은 음경의 은유인가?”라고 물으며 그것이 옳다고 자문자답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다 알다시피, 이광수 이래 1980년대까지의 우리 문학은 대개 ‘거대담론’의 자장 안에서 그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언 와트가 근대 소설이 중세소설과 갈리는 지점이라고 설명한 ‘리얼리즘(Realism)’은 우리에게 있어 1980년대까지 ‘거대담론’을 소설 안에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남성적 세계이다. 산업화, 혁명, 전쟁, 미소 냉전 등은 여전히 남성적인 것이었으며 여성은 프랑스 혁명 이후―여권 신장 운동을 포함하는―에도 줄곧 그 ‘주류 세계’에서 비주류의 집단, ‘특정 집단’으로 가두어졌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대개의 경우 ‘사회 vs. 개인’의 대결 구도로만 그려진다. 개인의 내면은 외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동서 냉전의 붕괴, 그 ‘철의 장막’의 종언은 이러한 남성의 세계, ‘거대담론’의 세계를 붕괴한다. 이에 관하여 평론가 황종연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하다.


 “개인 각자의 경험을 의미 있게 해주는 거대한 이야기가 붕괴한 자리에서 개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가. 그 거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삼은 집합적 주어가 폐기된 자리에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


  편편히 흩날린다. 개인들이 편편이 흩날린다. 모두를 규정하고 모두를 ‘하나’로 규정짓던 그 공동의 기억(거대담론)이 붕괴한 것이다. 그럼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개인 역시 지워지는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중세가 붕괴했던 시대, “신은 죽었다”하는 선언의 시대, 서사시가 끝나버린 시대에도, 인간은 스스로를 붙잡고 스스로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1990년대는 제2의 근대이자 그로서 각각의 내면을 발견하게 된 공간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우선 여성문학에 대한 규정이 필요할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여성문학’은 ‘여성작가의 글쓰기’이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고하고 저자가 지워진 자리에서 객관적 비평(독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지만, 여성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작가를 소거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여성의 글쓰기란 그 자체로 ‘주류 세계’에서 비주류의 집단으로 소외되었던, ‘특정 집단’ 정도로 가두어졌던 ‘여성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하는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성문학’은 단순히 문학적 의미의 ‘소설’의 범주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실체적 개인(작가)들의, 그 주체들의 탈억압, 탈남성주의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특수’하고 주목할 만한 일이라는 뜻이다.

  신경숙은 그녀의 장편소설 『외딴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걸 알게 한 건 다름 아닌 내가 외경스러워했던 글쓰기였다.”(p.37)

 

  ‘그것’이란 다름 아닌 작가 신경숙 혹은 화자(여성)의 자기 발견이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진행된 개인적 내면에 대한 천착과 특히, ‘여성의 여성 화자를 통한 자기 발견’이라는 줄거리를 갖고 나름대로의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소설가 신경숙

 


  Ⅱ. 수줍은 내면 그리고 상처 드러내기

  소설 속 화자가 작가 신경숙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확인할 바가 없다. 사실과 허구가 적절하게 혼합된 팩션의 형태일 수도 있고, 완전한 허구이면서 동시에 그 허구성을 재차 환기시키는 메타픽션일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나는 화자와 작가를 일단 분리하여, ‘화자’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까닭은, 작품만으로는 작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오로지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성’을 통해 ‘여성해방’을 말해볼 수 있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에 대해서는 다른 소설작품들과 비교되는『외딴방』만의 독특한 특색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이 글의 가장 마지막 ‘나가며’에서 짧게 다루도록 하겠다.

  1) 1장 – 1장의 화자는 제주도에서 16살 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고백을 시작하고 있다. 1978년을 말이다. 16살의 화자(이하, 소녀)는 시골집에서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쇠스랑에 발등이 찍히는 사고를 당한다. 이 사고는 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아마도 트라우마가 되었던 듯싶다. 이 소녀는 줄곧 “오빠, 나 좀 이곳에서 빨리 데려가줘.”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외사촌과 함께 서울의 직업훈련소에 입소하고 곧이어 동남스테레오에 입사한다. 노조에 가입하고 탈퇴하는 과정과 그 사이에 산업체특별학급에 들어가기까지의 기억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1장에 드러난 소녀(화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화자는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다음과 같이.

 

“내 여고시절은, 나 자신이 나 스스로를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나를,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다. 여간 친하지 않으면 그 시절 얘기를 함구해버리면서.”(p.70)

 

  여기서의 여고시절이란 ‘산업체특별학급’을 말한다. 소녀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고백은 어쩌면 억눌려 있는 여성의 내면을 드러내어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억압된 여성의 내면에 관하여서는 수전 구바와 길버트가 아래의 시를 인용하며 함축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전략) 그녀의 입술은 열려 있고, 벌어진/붉은 선을 통해 소리 하나 나오지 않네./그것이 무엇이든, 섬뜩한 상처가/침묵과 비밀에 싸여 피 흘리고 있네./어떤 한숨도 그녀의 말없는 비탄을 덜어 주지 못하고,/자신의 두려움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후략)”

 

그래,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떻게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건 타의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자의이었을 수도 있다. “나 스스로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다.”라는 고백을 보면 그녀 스스로 택한 일일 수도, 또 작가를 꿈꾸는 그녀를 비웃는 외사촌의 태도를 보면 타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나 소설 같은 것 말야.”
  외사촌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그러니까 작가가 되겠다는 거니?”
  열여섯의 나, 기숙사 마룻바닥에서 외사촌이 내 말을 묵살해버릴까 봐서 열심히 더 말한다. …외사촌은 편지지 위에 대고 있던 볼펜을 턱에 갖다대고 고갤 갸웃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나는 것 같던데?”
  나는 외사촌이 그러니 너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라고 할까봐 조바심치며 좀 더 말한다.(p.41)

 

  그렇다면 “섬뜩한 상처”란 무엇일까? 나는 가장 근원적 상처가 다름 아닌 외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쇠스랑에 발등이 찍힌 사건’이 아닐까? 소설의 회상이 ‘말 못 할 사연’의 ‘힘겨운 고백’이라고 할 때, 이른바 ‘쇠스랑 사건’을 소설의 초두에 놓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0세기 기억이론의 대가 알라이다 아스만은 “가시적인 육체의 상처나 흉터는 망각에 의해 중단될 수 없는 지속적인 기억의 흔적을 보장한다. 기억은 현재의 조건들 속에서 재구성되고 변형되거나 조작․왜곡될 수 있지만, 육체에 새겨진 글과 트라우마는 과거의 기억을 고정시키고 확인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하는데, 『외딴방』의 화자에게 있어, ‘쇠스랑 사건’은 다름 아닌 “중단될 수 없는 지속적인 기억의 흔적을 보장”하는 외상이 되는 것이다. ‘쇠스랑 사건’이 일어났던 때로 되돌아가 보자.

 

  “놀란 발바닥에선 피도 나지 않는다. …아픈 줄도 모르겠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엄마의 기척을 느끼고서야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때서야 무섭고 그때서야 아프다.”


  이것이 핵심이 아닐까? 아프지만 꾹꾹 참는 것,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화자가 고백하고자 하는 열여섯부터 스무 살까지의 기억이 아닐까? 또, 그래서 이제야 고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1장~4장까지 중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쇠스랑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2) 2장 - 2장은 김미진의 유서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생리하지 않는 ‘나’가 뒤늦은 생리를 시작하고, 산업체특별학급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공들이 자살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다. 1976년 실제로 있었던 ‘동일방직 여공 반나체 시위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이 사건이 1979년에 일어난다. 이 소설이 ‘소설일 뿐이라는 가능성’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이러하므로, 작가와 화자를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수줍은 고백’이라 읽을 것이며, 또 ‘섬뜩한 상처’, ‘소거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몸의 기억력.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로부터 십육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자세로 잠들고 그 자세로 잠든 날이면 아침에 똑같은 자세로 일어난다.”(p.129)

 

좁은 외딴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부대끼며 자던 밤들. 큰오빠에게 잠버릇을 한 번 혼난 뒤로 뒤채지 않기 위해, 들인 습관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 이것 역시 일종의 외상일지 모른다. 수전 구바와 길버트가 말한 “섬뜩한 상처”일 수 있다. 그 유년기, 그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화자의 몸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지속적인 기억을 보장한”다는 외상. 그것은 지속적으로 ‘나’의 몸에 겹치고 겹치며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상처가 ‘나’에게만 있으랴. 아래를 보자.

 

 “내 손가락 이렇다는 거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p.137)


  산업체특별학급에서 만난 ‘나’의 짝 안향숙의 말이다. 안향숙은 제과회사에 다니는 여공으로 하루에 “보통 이만 개 정도”의 캔디를 포장하는 일을 한다. 그녀의 손바닥은 “발바닥 같”다. 손가락은 하루 이만 개의 캔디를 포장하느라 곱았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여서, 안향숙은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문맥 상 원래부터 왼손잡이가 아닌 그녀가 말이다. 마음은 치유된다 하더라도, 그 곱은 손가락은 평생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통해 과거의 기억들이 반추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또 있다. 아래는 “희재 언니”의 말이다.

 

  “미싱바늘에 찔렸거든, 물에 손을 넣었더니 불었어. 어느 방에 살아?”(p.147)

 

  상처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여공들에게 있다. 그것은 지워질 수 없는 것, 영원한 것이다. 희재 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손을 미상바늘에 찔렸다. 병원에 갈 생각도 안 하고, 물에다 손을 담그는 것으로 처치를 마쳐버리는 희재 언니다. ‘나’는 희재 언니의 상처를 보며, 우리에게 보여주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이러한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오히려 내면 깊숙이 숨게 되는 것이 여성들이었다. 다음의 ‘희재 언니’와 ‘나’의 “그럼 게임”은 (신경숙이 『외딴방』 속에서 그리는) 여성들이 뭘 원하고 욕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전략)
   난 잡을 자겠어. 사흘 나흘 깨지 않고 푹 자겠어.
   …… 그럼.
   동생이 학교 졸업하고 설마 대학 간다고는 안 하겠지. 안 그래?
   …… 그럼.
   (중략)
   모르는 소리. 이보다 더 일할 수는 없어. 하루는 24시간뿐이니까.
   ……그럼.
   (후략)“(p.149)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화자는 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이 완성되면 나는 온전히 다른 열정 속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간헐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내 안의 난폭함과 야만성 무질서와 섬약함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p.202)


  다시, 수전 구바와 산드라의 말을 상기하게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왕비는 그 사과를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매우 비밀스러운 외딴 방”에서 만들었다.”(p.117, 『다락방의 미친 여자』, 인용문 안에 이미 쌍따옴표가 있어서 이중으로 썼다. 그러나 저자 두 사람이 인용한 문구인지 그 출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불확실하다.) 구바와 산드라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숨겨진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 욕망이란 섹슈얼한 것일 수도 있으며, 표출되지 못한 내면일 수도 있다. 그들은 분석한다. 전통적으로 문학 속에서의 여성이란 남성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미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마, 하나는 천사. 남성들은 ‘천사’의 이미지를 선호하며, 그것을 숭앙한다. 백설공주 이야기 속의 ‘계모(왕비)’는 이 악마 이미지의 구체적 발현이며, 백설공주는 ‘천사’의 이미지다. 이렇게 되면 왕비가 그토록 백설공주를 죽이려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페미니즘 이론은 바로 이 ‘천사’의 이미지를 깨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것이 남성에 의한 억압에서 시작되었다. 『외딴방』 속에서 억압 받는 자는 모두 여자이며, 그렇지 않은 자는 거지반 남자이다. 얼핏 ‘가부장적 권위’를 떠올리게 하는 큰오빠, 대학생이 되는 ‘셋째오빠’, 산업체특별학급의 ‘최홍이 선생’, 여공들에게 껄떡거리는 ‘이 계장’, 죽은 대통령,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사장, 온화한 목소리의 ‘노동조합장’ 등등. 이들은 모두 여성의 자리 반대편에 서있으며 직접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여성의 존재를 억압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2장에 그려진 여공들의 ‘자살 시위’는 다시 한 번 곱씹어 볼만하다. 여공들은 왜 그런 시위를 하였는가? 게다가 그들은 반나체였다. 강간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이 사건은 왜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가? 나는 이 장면에 강렬한 상징성 즉, ‘여성의 해방에의 욕구’가 구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에게 섹슈얼의 대상, 피지배의 대상일 뿐인 여성들이 드디어 완전한 해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는 점 때문이다. 2장에서, 이 장면은 소설 전체의 주제의식을 꿰뚫는 핵심적인 장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3장 – 이제 ‘나’는 18살이 된다. 어느 날 사라졌던 셋째오빠가 돌아온다. 큰오빠는 “허리가 잘록한 여자”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셋째오빠의 몸에는 온통 멍투성이다. 알고 보니 데모를 하고 다닌단다. 일곱 살 호기심 많고 질문 많은 조카의 얘기도 나온다. 희재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더 벌기 위해 2공단 초입의 의상실에 들어간다. 그해 봄 셋째오빠는 데모를 한다며 외박이 잦아지고, 큰오빠와 크게 다툰다. 그 와중에 광주사태―셋째 오빠가 ‘혁명’이라 강조하는―가 터진다. 노조는 해체되고, 당시는 노동조건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불경기가 극심해 회사는 생산라인을 축소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여공이 늘었다. 오빠는 '나'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대학 입시에 전념토록 한다. 외사촌은 공장과 학교를 모두 그만둔다. 큰오빠는 외사촌을 동사무소에 취직시킨다.


“……내 아무리 집착해도 소설은 삶의 자취를 따라갈 뿐이라는, 글쓰기로서는 삶을 앞서나갈 수도, 아니 삶과 나란히 걸어갈 수조차 없다는 내 빠른 체념을 그는 지적하고 있었다. 체념의 자리를 메워주던 장식과 연출과 과장들을.”(p.243)

 

  많은 여성비평가들 ―예를 들어,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엘런 모어즈(Ellen Moers)의 『Literary Women』, 패트리샤 마이어 스팩스(Patricia Meyer Sparks)의 『여성의 상상력(The Female Imagination)』, 에리카 종(Erica Jong)의 다양한 글―은 한 가지 관점에서 문학에 대한 의견이 일치한다. 즉, 폭력, 분노, 상황 부적응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에너지원이었다는 것이다. 


  “래드클리프의 고딕소설(17세기)를 필두로 브론테 자매의 소설, 매리 셸리의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을 거쳐 진 리스, 이디스 워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이르기까지(『델러웨이 부인』은 사회적 안주인의 냉엄한 생활에 대한 승화된 해석, 시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이러니와 비판적인 시각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여성문학의 특징은 공격적이고 고발적인 언어였다. 모두들 분노하고 반항했다. 물론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서 좀 더 아이러니하고, 좀 더 현명한 작가도 있었다.”

 

   신경숙은 브론테나, 버지니아 울프 등과는 다르다. 흥분하지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체념”이 소극과 내성의 결말은 아니다. 그것은 문체적인, 지극히 작법적인 체념이다. 소설의 문장은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 그 뒤의 문장은 서로의 자장 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소설은 “삶을 앞서나갈” 수도, “삶과 나란히 걸어갈 수조차 없”다. 소설은 결코 삶을 다 닮지 못한다. 고백할 것이 많은 소설가 화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신경숙은 소설적 문장의 한계를 잘 알면서도 해야 할 말은 조근조금, 조심스럽게 다 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신경숙의 소설이 “폭력, 분노, 상황 부적응” 등에 속해 있음을 반증한다.

호기심 많은 조카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서도, ‘말하고 싶은 욕망’,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어물어물 그렇다고 했다. …내가 대답을 못 찾고 그러니까. …어버버거리자, …대답을 못 하고 헤매는데 …내가 어물거리며 그저 웃기만 하자…”

 

 말은 할 수 있다. 하고도 싶다. 그러나 쉬 하지 못한다. 여태 그 조카의 순수한 생각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고, 순수함을 가장한 세상에 많이 속아왔기 때문이다.

 

  4) 4장 - '희재 언니'는 같은 양장점 동료 남성과 동거를 하게 된다. 적금을 타면 그와 결혼할 생각이다. 외사촌은 시골에서 올라온 여동생과 따로 방을 얻어 나간다.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희재 언니와 남자. 희재언니는 자꾸만 운다. 어느 날 아침, 희재언니는 방문 잠그는 것을 잊었다며 시골에 며칠 가있을 테니 '나'에게 문 좀 잠궈 달라고 부탁한다. 며칠 뒤 희재언니의 남자친구가 찾아온다. 그는 희재언니에게는 시골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그곳엔 죽은 희재언니가 누워있다. 나는 그곳을 뛰쳐나와 가리봉동을 떠난다. 큰오빠는 취직하여 형편이 나아지고 '나'는 대학생이 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나'는 희재언니를 떠올리며 지금, 글쓰기에 대해 고민을 다시 한다.

  4장에 들어선 나는 다음의 문장을 읽으며, 이제 조금 달라질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직업훈련원에서 처음 납땜을 배웠을 때 엄지손가락 위로 튀었던 뜨거운 납덩어리가 만들어놓은 흰 흉터가 아물은 것밖에는.”(p.352)

 

 ‘쇠스랑’으로 시작한 외상들이 아물고 있는 것일까. 그것으로부터 촉발되고 되새김질되는 아픈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 “섬뜩한 상처”가 지워지고 있는 것일까? 소녀는 이제 19살이다. 산업체특별학급의 졸업반이다. 이제 벗어나는 것인가? 나는 수전 구바와 길버트의 문장을 상기한다.

 

  “자신의 두려움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않더라도……. 그러나 말하려 하는가? 이제 본격적으로 말을 시작하는가? 소설의 문장은 이러한 나의 의문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온다.

 

  “나중에 글 쓰는 사람이 되거든, 우리들 얘기도 쓰렴.” 미스 리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p.355)

 

  작가가 되겠다는 고백을 했다가, 외사촌에게 비웃음을 받았던 소녀. 이젠 자신과 ‘불편한 관계’였던 미스 리마저 따뜻하게 소녀의 꿈을 인정해준다. 써라.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나는 것 같던데?”하던, 그 작가가 되어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그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외부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작가가 되어 “우리들 얘기를 쓰”라는 건, 이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것. 그것이 아닐까. 화자는 혹은 작가는 이 문장들을 통해 소녀의 탈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장에는 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자리에서 13일 만에 살아서 되돌아온 유지환이라는 소녀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며, 화자는 무엇이라 말했는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저 얼굴, 내가 사랑했던 얼굴. 그녀다. 어둠 속에서 칠흑 속에서 살아 돌아온 얼굴.”(p.358)

 

  나는 확신했다. 화자가 이제 그 ‘지독한 시대’로부터의 탈출을 이야기하려 하는구나. 그래서 큰오빠의 취직과 이사를 이야기하는구나. 하고. 그러나 나는 희재언니의 죽음 앞에 과연 내가 상상한 희망이 적절 하였는가 의문을 갖는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p.377) 죽음을 예언한 듯한 그 말을 남기고 “구더기 밥”(p.384)이 되어버린 희재언니. 화자는 차마 희재언니의 죽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 뛰쳐나온 기억의 상징 때문이었을까? 희재언니의 죽음 이후에도 소녀(화자)의 삶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오빠가 충무에서 다시 상경하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고……. 결국엔 내가 예상했던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벗어나는 것이다. 자꾸만.


  “지금 이 글에 마침표를 찍으려다 보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 자신에게 서먹서먹하게 얘기를 시키고 있었다는 생각.”(p.388)

 

  화자는 자꾸 어렸을 적의 자신에게 말을 시킨다. 그것은 “섬뜩한 상처”에의 직시이자, “자신의 두려움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반성적 행위일 것이다. (여성)화자에 의해 여성 자신의 내면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여성에 의한 적극적인 의지일 것이다.

  소설은 다음 문장으로 실질적인 막을 내린다. 이미 소설의 초두에서 나온 말이다.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다.”(p.68)

 

  길었던 고백문의 마지막이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p.424)


  바로 여성의 내면 고백이다. 화자의 글쓰기란.


  Ⅲ. 나가며

  분명히, ‘여성해방’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지점들이 『외딴방』속에는 존재한다. 여공들이 받았던 그 부당한 처우, 열악한 임금, 별스럽지 않게 대해지던 인권 등은 비단 ‘여성’ 혹은 ‘여공’들 뿐만 아니라 그 시대 99% 노동자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분명히 이 부당한 시대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한 시선은 분명 여성들을 향해있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는 (불행하게도) 달리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차이도 차이이거니와 그 이전까지 여성을 억압하던 기재까지 겹쳤기 때문에, 더더욱 비극으로 치닫는다.
  나는 그 속의 ‘여성’에 집중하고 싶었다. 작가도 여성이거니와 소설 속 주요한 인물들은 거지반 ‘여성’(여공)이라고 할 때, 작가가 화자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들어와서 1980년대까지 세계와 문학을 지배했던 거대담론의 붕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각인들의 노력 그중에서도 ‘여성적 여정’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주 성글고 빈약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외딴방』은 외딴방으로부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깨고 나오는 여성과, 그 메커니즘으로서 규명되는 개인들의 의미 있는 내면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글을 마치며 『외딴방』속 무수한 말줄임표들을 상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