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이고 우울한 후광
[손창섭 단편소설이 '연극적'으로 읽히는 이유]
쓰지 히토나리(辻仁成)는 단언한다.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라고. 신형철은 그의 이 말을 인용하며 “매력적인 단언”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에 대해 동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손창섭’은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여러 단편소설의 형식을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결과 그는 ‘필연성’이 무엇인지 아는 작가였다. 신형철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작가’는 “라이터(writher)이지 작가(作家)가 아니다.”(신형철의 언급에 관해서는 『몰락의 에티카』 참고)라고 했는데, 그들은 ‘필연성’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창섭은 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불구적이되, 손창섭의 소설 작법은 경이적이다.
손창섭의 단편소설에 대한 최초의 감상은 ‘연극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 드러나는 공간적 상황이 지극히 연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한 작품 당 3~4인의 ‘등장인물’이, ‘제한된 공간’ 안에 배치되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연극이 범속한 규정에서 ‘무대를 전제하고 쓰인 희곡의 실행’이라고 할 때, 등장인물의 실제적 활동 범위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손창섭 단편소설 속의 공간-인물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손창섭은 왜 소설에 희곡적 형식을 도입하였는가?”하고 말이다. 나는 분명히 ‘공간’과 ‘인물’ 사이에 필연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동시에 ‘연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혹 작가가 ‘이렇게도 쓸 수 있고 저렇게도 쓸 수 있다.’라는 기술자적 발언을 한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소설이 되려거든 필연적 개연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가로서의 손창섭을 신뢰하는 입장이었고, 우선적으로 우호적인 가정을 상정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 가정을 텍스트에 밀착하여 분석해 볼 요량이다.
그의 모든 단편소설을 일거에 꿰뚫는 고갱이를 탐구하고 찾아내고 싶은 욕망이 없지 않았으나 나의 깜냥으로 그 정도의 것을 건사하기에 어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소수’의 작품으로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생각은 없다. 일단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수’의 작품을 다루기 때문이고, 동시에 ‘손창섭 소설의 특징 중 하나’를 연구해보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분석 대상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골라봤다.
공휴일, 사연기, 비 오는 날, 생활적, 혈서, 피해자, 미해결의 장, 인간동물원초, 잉여인간 등
(바탕 텍스트는 문학과지성사 판 『손창섭 단편선-비 오는 날』로 삼았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 단편선에 실린 모든 소설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소설가 손창섭은 2010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일본에서 작고했다.
1. 불구적 인간으로서의 잉여 - ‘인물’에 관하여
많은 비평들이 손창섭 소설 속 인물과 공간에 대해 ‘불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불구적’이라는 용어보다는 ‘잉여’라는 단어가 소설 속 인물과 공간을 지시하기에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불구’는 그 속성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잉여’라는 것은 그 속에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의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손창섭 소설 속 인물들이 결코 ‘개인적 원인’에서 불구가 된 것은 아니라는 나의 믿음 때문이었다. 개인적 원인이 아닌 사회와 관계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불구가 된 것’이다.
소설 속 인물 중 상당수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비오는 날」의 동욱과 동옥은 1․4 후퇴 당시의 피란민이고, 「혈서」의 인물들은 전란으로 인해 규홍의 집에 기숙하게 되며, 「피해자」의 순실은 6․25 당시에 남편을 잃으며, 「미해결의 장」의 문선생은 피난지에서 부인을 잃고, 「희생」은 아예 전쟁체제 ‘안’의 이야기이며, 「잉여인간」의 봉우는 사변 이후 만성적인 수면 부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의 ‘불구성’이라는 것이 비단 ‘한국전쟁’ 탓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연기」, 「신의 희작」와 같은 작품에서는 한국전쟁이나 그 후의 상황보다는 ‘해방 직후’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으로 그린다. 소설 속 인물들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불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그 원인과 양태가 다양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러한 ‘불구의 원인’에 대하여 단언하는 것은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범박하게나마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전쟁이든, 8․15 광복이든 모두 ‘거대한 변화’을 뜻(해방도 결국 ‘전후’라는 범주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불편한 진실이기는 해도, 우리의 광복은 곧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 측 패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불구들이 한국전쟁 ‘밖’과 ‘안’의 경계에 어설프게 걸쳐있다고 한다면, 광복 직후의 인물들 역시 그 ‘안팎’의 상상된 경계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거대 사건을 하나의 의미망에 담을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하며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일시적으로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면 말이다. 이 거대한 무엇―대표적인 것이 이데올로기―으로부터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해 추방될 경우, 손창섭 소설 속 인물들의 군상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쟁’의 경우 그것을 만약 ‘체제’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안’과 ‘밖’이 존재하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전쟁체제’의 ‘안’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불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불구’의 의미가 다소 다의적인 것 같다. 나는 이 ‘불구’의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첫째는 육체적 불구이다. 「비오는 날」의 동옥(한 쪽 다리의 미 성장(진단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신경숙의 단편소설 「지붕과 고양이」의 원희를 떠올리게 한다. 원희는 유년 시절 성폭행 당한 충격으로 다리가 자라지 않게 된다. 정신적 충격이 육체적 외상으로 직결된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대개의 경우는 외상이 원인이다.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처럼 말이다. “1878년 5월 30일 보스크성에서 앙리는 의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야외활동의 즐거움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승마와 사냥, 그리고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열세 살이었지만 열 살밖에 안 돼 보였다. 다음해 그는 피레네 산맥의 온천지인 바레주에서 오른쪽 다리마저 골절상을 입었다. 그 후 그의 다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앙리는 불구가 되었다.”(『툴르즈 로드레크-밤과 빛을 사랑한 화가』, p.15, 클레르 프레셰 저, 김택 옮김, 시공사, 2006)))이라던지, 「사연기」의 성규(폐결핵), 「생활적」의 순이, 「피해자」의 병준(곱추), 「광야」의 춘화(벙어리), 「희생」의 수옥(포탄 파편의 복부 관통), 「신의 희작」의 S(야뇨증) 등의 경우가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는 정신적 불구이다. 정신적 불구와 육체적 불구를 엄밀한 의미에서 떼어내기란 불가능하지만, 어느 것이 주요한 원인이냐에 따라 분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6․25 이후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잉여인간」의 봉우는 정신적 불구의 상태가 육체적 불구의 상태를 야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사회적 불구의 상태이다. 사실, 손창섭 단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지반 이 범주에 속할 만하다. 하지만 「잉여인간」의 만기(치과의사)나 「공휴일」의 도일(은행원), 「비오는 날」의 원구, 「사연기」의 동식(교사), 「미해결의 장」의 광순(직업여성) 등은 육체적 불구도 아니고, 정신적 불구도 아니지만 결코 ‘불구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은 이 세 번째 불구의 분류에서 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분류는 상호 교호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사실 상 손창섭 단편소설 속 인물들은 이 세 가지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각 분류는 관점에 따라 세분될 것이나, 이 보고서의 논지에 효율적으로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아, 천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불구적 인간들은 한데 묶을 수 있는 방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잉여인간’이란 기성의 사회가 구성 진행 혹은 구성 완료된 상태의 외부 혹은 가까스로 그 경계에 걸친 인물들이란 뜻이다. 사회가 개인을 불구로 만든 것인지, 개인이 불구의 길을 선택한 것인지는 소설 텍스트 자체로는 분석 불가능하다. 그러나 추측은 가능하다. ‘둘 다’인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밀어내고 개인이 사회를 밀어내는 방식으로서의 비극 말이다. 그러나 사회와 개인이 등가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의 크기라면 ‘사회’ 쪽이 훨씬 클 것이기 때문이다.
손창섭 작가의 잉여인간은 1964년,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2 잉여인간들의 방 - ‘장소’에 관하여
어찌되었든, 이제는 ‘공간’에 대해 살펴 볼 차례이다. 사실, (이 보고서에서) ‘공간’이란 용어는 합당하지 않다. ‘공간’이란 용어보다는 ‘장소’가 더 적확할 것이다. 나는 이 구분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기 이전에 언어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를 통해 분별이 있어야 함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공간’은 ‘장소’를 포함하는 ‘그 이상’의 전체이며, 소설에서 ‘공간’의 의미는 대개 작품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통칭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과 함께 ‘시간’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다소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다의적인 것으로서의 ‘공간’이란 단어를 인식하게 한다.
이렇게 데면데면하고 추상적이며 비가시적이고 다의적인 ‘공간’과 대비하여 ‘장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장소’는 의미와 가치와 상징 등으로 채워지면서 친밀하고 편안해진 구체적 공간이다.(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그 ‘장소’의 정체성은 개인과 집단생활의 열망, 욕구, 기능적 리듬 등을 극화(劇化)함으로서 성취된다. 또한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공간은 장소가 된다. 공간은 움직임이며 개방이며 자유이며 위협이다. 장소는 정지이며 개인들이 부여한 가치의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이 되는 것이다.(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정영철 옮김, 태림문화사, 1995, p222-223, 247-251)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손창섭 단편소설 속 인물들이 머무는 ‘장소’가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으로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단언하건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공간과 장소의 구분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장소 특히, 손창섭 소설 속에서는 ‘집’(「인간동물원초」의 장소로서 등장하는 ‘감옥’ 역시 이 집의 극단적 표현과 다름 아니다.)은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면서 그 인물들의 내면상태와 매우 닮았다는 점이 시선을 끌었다.
소설 속 장소들은 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두 번째 갔을 때에는 지난 번 빗물 쏟아지던 자리에 양동이가 놓여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제창 떼꾼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주먹이 두어 개나 드나들만한 그 구멍은 다다미에서부터 그 밑의 널판까지 뚫려 있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그 구멍을 통과하여 널판 밑 흙바닥에 둔탁한 음향을 남기며 떨어졌다.(「비 오는 날」, p.61)
거적만 깔았을 뿐인 마루방이라 파리한 엉덩뼈가 아파서 한 모양대로 오래 누워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집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아 동주는 눈을 떠본다. 정말 집이 약간 흔들리는지도 모른다. 세운 지 오랜 판잣집이어서 그렇게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두 칸 분수는 실히 되게 지어가지고, 판자로 절반을 막아버렸다.(「생활적」, p.71-72)
대문짝은 물론, 안방 건넌방의 문짝이며 마룻장까지도 죄다 없어진 채로 있었다. 안방에만 문 대신 거적이 드리워 있었다.(「혈서」, p.113-114)
간반 방에는 안개처럼 먼지가 뿌옇다. …그러면 마치 빛 없는 동굴이 아니냐?(「미해결의 장」, p.151)
동굴 속 같이만 느껴지는 방이다.(「인간동물원초」, p.194)
…이렇게 초라한 흙벽돌집의 단칸방을 얻어 지내는 궁색한 꼴을 면할 뿐 아니라…(「유실몽」, p.231)
헛간으로 쓰던, 퇴락한 토막집이나마, 우선 부녀가 거처할 수 있는 집을 준다니 다행이었다.(「광야」, p.287)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닥에 물을 뿌리고 방구석이나 테이블까지도 말끔히 쓸어내는 것이다.(「잉여인간」, p.323-324)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대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방문도 걸려 있었다. 부엌으로 가서 사잇문을 밀어보니 그것도 꿈쩍 안했다. 엄마 문 열어 하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안에서 먼저 히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이상해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대낮인데도 방바닥에는 이불이 펴 있었다.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와 낯선 남자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신의 희작」, p.379)
손창섭 소설의 장소는 그 자체가 불구의 표상(「사연기」, 「비 오는 날」, 「생활적」, 「유실몽」, 「혈서」 등)이거나, 진입 불가능한 장소(「피해자」, 「신의 희작」 등)이거나 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갈등하는 ‘대합실’로서의 장소(「잉여인간」, 「혈서」, 「인간동물원초」 등)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불구의 표상으로서의 장소를 보자. 불구의 표상이라 함은 그 안에 거주하는 인물의 무의식을 상상적으로 구성해 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장소는 곧 인물의 무의식이다. 초자아의 통제를 뚫고 “제창 떼꾼히 구멍”(비 오는 날)을 비집고 의식 속으로 발현하는 그 무의식으로서의 공간이다. 「사연기」의 ‘동식’의 방은 ‘무의식의 구체적 공간으로의 현현’을 잘 드러낸다. 동식은 “벽 한 귀퉁이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아랫방을 내려다 보”(p.46)는 것이다. 동식에게 ‘아랫방’은 ‘성규’라는 초자아로서 통제되는 ‘의식’의 세계이다. 그가 끊임없이 ‘성규’의 눈치를 보는 상태가 이것을 방증한다.
동식의 앉는 자리에 따라 성규의 신경이 과민하게 자극을 받고, 그러므로 해서 자연 동식이 또한 아무데고 덥석 앉지 못하고 적당한 자리를 택하기에 마음을 써야 하는 우울을 눈치 못 챌 정숙이 아니었다.(p.30-밑줄은 인용자)
「비 오는 날」에서 역시 무의식의 적나라한 노출은 ‘장소’로서 대변되고 있다. 그 속에 사는 동욱과 동옥은 정신적 혹은 유체적 혹은 둘 다의 불구성을 지니고 있고, 그들이 사는 집은 바닥에 “제창 떼꾼히 구멍이 뚫”려, “주먹이 두어 개나 드나들만한 그 구멍은 다다미에서부터 그 밑의 널판까지 뚫려 있”(p.71)는 것이다. 지붕-방-바닥은 본래 삼분(三分) 되어 있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기능이 상호 보완 교호하되, 엄밀한 직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삼분은 의식-초자아-무의식의 경계가 붕괴한 것과 같이, 지붕부터 다다미, 그 밑의 널판까지 뚫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공식’을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 일 것도 같으나, 손창섭 단편소설 속 ‘장소’가 일반적으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표상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 장소의 (거친) 구분이 ‘불구의 표상’이든 ‘진입 불가능한 장소’이든, ‘대합실로서의 장소’이든, 결국 그 장소들이 각인의 내면을 공간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서문’으로 잠깐 되돌아 가보려고 한다. 나는 ‘서문’의 2번째 문단에서 “손창섭의 단편소설에 대한 최초의 감상은 ‘연극적’이라는 것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탐구 방향은 “손창섭은 왜 소설에 희곡적 형식을 도입하였는가?”라는 궁금증을 해결하는 여정이 될 것임을 예고했었다. 내가 이 시점에서 ‘서문’의 전제를 상기하는 까닭은 그 궁금증이 풀어질 것 같은 직감 때문이다. 결론 나는 “손창섭 소설 왜 연극적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지금에 이르렀다. 나름대로의 생각의 정리를 통해 일단의 결말에 도달하기는 하였지만, 과연 그 과정이 엄밀하였는가, 혹은 무류적(無謬的)인가에 대해서는 불안감이 앞선다. 그러나 손창섭 소설이 연극적인 특성을 갖고, 그것이 동시대의 여타 다른 소설들과 그의 소설을 차별 짓는 하나의 잣대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손창섭은 희곡적 작법을 통해 그의 소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희곡’이나 ‘연극’이 아닌 것은 먼저 대사와 지문을 통하지 않았다는 형식적인 문제에서 그렇고, 그 다음은 실제의 ‘무대’가 아닌 텍스트 속의 무대라는 점에서 그렇다. 손창섭 소설은 희곡이나 연극이 아닌 말 그대로 ‘소설’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손창섭 소설을 읽는 데에 있어 여타 소설들에 대한 독법과는 별개의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2. ‘인물-장소’의 필연적 관계 그리고 연극적 인상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앞 선 본문에서 누차 반복한 바와 같이) ‘인물’과 ‘장소’의 관계가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인물’과 ‘장소’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을 ‘모방’하거나 ‘재현’한 형태가 아닌 ‘상상’의 소산물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적 있는데, ‘안-밖’(전쟁 중이든, 사회 형성 과정이든)이라는 경계가 기실 ‘상상된 공간’이며 그 위에 선 ‘경계인’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상 역시 ‘상상된 형상’이라는 점은 텍스트의 맥락 상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소설 속에 구성해낸 ‘인물’과 ‘장소’는 기실 실제적인 인물의 실제적인 재현이 아니라 ‘상상’ 수준을 것을 구체화시켜 놓은 구조물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2차원 수준의 ‘추상적인 지평’에서 길어 올린 3차원의 인물, 장소란 그 관계에서 있어 필연적으로 엮여들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생성’의 과정이 지극히 ‘희곡적’으로 읽히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2차원의 ‘희곡’을 3차원의 ‘무대’로 치환시키는 과정은 이렇게 해서 손창섭 소설 속 인물과 장소의 생성 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므로 손창섭 소설은 ‘연극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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