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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산처럼 생각하기, 로버트 베이트만

 

 

  들어가며 : 토목에 집착하는 대통령

 

  토목에 집착하는 대통령을 보며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귀를 막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그 분을 보며, 문득 찾아오는 무기력함은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까. 이제 그에 대한 국민들의 공분은 노이로제 수준이다. 민선 시장 시절에 만든 ‘시멘트 설치 미술품 : 청계천’이 흥행하자, 대통령이 된 뒤에는 4대강, 우리의 젖줄에 그와 같은 시멘트 구조물을 만들려 하고 있다.
  물론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적절한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치산치수는 자연을 부정하는 일이라기보다, 자연에 순응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연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획득하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어떠한가. 말은 그럴 듯하게 4대강 ‘살리기’라고 해놓았지만, 기실 기만도 그런 기만이 없다. 기표와 기의가 정확하게 부조화 한다. ‘사람 살리는 총’, ‘민주적인 군대’, ‘미국의 진정한 뜻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구원하는 것’과 같은 문장처럼 허위와 위선이 가득하다.
  ‘4대강 사업’은 곧 ‘死대강 사업’이다. 찬성론자는 더러 이 사업을 ‘경부고속도로’에 비교하곤 한다. 우스꽝스러운 비유다. 생각해보자. ‘경부고속도로’는 ‘물류’ 즉, ‘교통’을 위한 토목 시설물이다. 그런데 ‘4대강 사업’을 ‘고속도로’에 비유하는 것은 제 스스로 그것이 ‘운하’의 사전 단계라고 토설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그토록 절절히 내세웠던 ‘대운하 사업’을 결국 자신의 입으로 ‘포기하겠다’라고 말했으면서도, 그것의 변용인 ‘사대강 사업’을 ‘경부고속도로’에 비기는 것은 결국 “운하의 다른 이름이 ‘사대강 살리기’ 사업이요.”하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서평에 앞서 서문을 이런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인간의 독선과 무지 때문에 그간의 지구가 황폐해져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앞으로 쓰게 될 ‘산 처럼 생각하기(Thinking Like a Mountain)'의 저자 로버트 베이트먼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려 깊은 반성과 희망에 찬 행동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지킬 만한 값어치가 있는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

 

  대통령이 좀 더 '사려 깊은 반성'을 하길 바라며 서평을 시작한다.

 

  2. 생각하지 않으나 지혜롭다.

▲ 산 처럼 생각한다는 것(To think like a Mountain) : 상생을 이해하는 것

 

  우주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 역시 생각하지 않는다. 무념의 세계이다. 그곳엔 칼날 같은 이성의 번뜩임이 없고, 너와 나의 말이 없다. 고요한 가운데 무념이다. 그러나 왕성하다. 번잡스러울 만큼 모든 것이 다떠위며 계절을 이고 생명을 소생하게 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요, 생물의 피라미드가 인간적 공리가 아닌 자연적 공리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무념의 세계는 그러나 위엄이 있다. 산 앞에 엄숙해지지 않는 사람 없고, 바다 앞에 경외하지 않는 사람 없으며, 하늘 밑에서 하늘을 우러르지 않는 사람 없듯이.
  저자 로버트 베이트만은 알도 레오폴드의 표현을 빌려 책의 타이틀로 삼았다. 산 처럼 생각하기(Thinking Like a Mountain). 무념의, 그러나 역동적인 산, 그것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낭만주의자의 의인화된 비유법일 뿐일까. 그러나 책의 표제는 결국 책이 말하고자하는 핵심 키워드임을 상기할 때, '산 처럼 생각하기'라는 말을 유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베이트만이 서론에서 쓰고 있는 말을 보자.
 

자연은 번잡하고 제멋대로다. 산업화된 농업은 산뜻하고 체계적이다. 자연계는 복잡하고 상호관계를 맺으며 본래 자기보존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단일경작 농업은 단순하나 허약하다. 벌레 하나, 악천후 한 번에도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자연은 번잡스러울만큼 소란스럽다. 고요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생명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계의 생물들은 복잡한 상호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산은 이를 주관한다. 생물들의 원리는 곧 산의 원리이며, 생물들은 산에 의지하며 산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생태계는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라는 사실을 익히 배웠다. 개체수가 증가하면 그보다 상위에 있는 포식자에 의해 일정수준까지 개체수의 조정이 이루어지며, 반대로 포식자가 많고 피포식자가 적은 경우에는 자연스레 포식자의 수가 줄어든다는 그 자명한 사실 말이다. 설혹 어떤 이유에 의해 일부가 파괴(오염)되더라도 본래의 모습을 스스로 갖춰가는 것도 자연이다. 결국, '산처럼 생각하기'란 '조화와 창발(創發)을 이해하고 체화하여 생각하기'의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개발해낸 단일경작 농업은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불안정하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순간에 파괴되고, 헝클어진다. 문제는 그 허약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 단일경작 농업의 문제점을 다각도로 비판하는데, 환경주의적인 것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휴머니즘도 포함되어 있는 비판이다.
 

  미국의 위대한 미생물학자인 르네 듀보는 미래의 인류에게 닥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의미 있는 노동의 상실"이라고 대답했다.(27p)

 

  우리 인류는 오랫동안 농업을 숭상해왔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농업혁명'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농업이 인간 생존의 가장 근본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우리 선인들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까지 칭하며 농업을 숭앙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농업을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살펴보면 '생존'이라고 하는 실리적 문제보다 좀 더 깊은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자연에의 인간의 이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현대적인 세계는 사람들을 모두 기성품 구매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44p) 자신이 입고 먹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저자는 '푸딩'을 예로 드는데, 그 값싸고 맛있는 간식거리를 자신도 먹고 아이들에게도 먹이면서 그 속에 대체 무엇이 들었으며, 설혹 성분표를 통해 그것을 알더라도 대체 그것들이 자신과 아이의 몸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농업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거대자본에 의해 잠식 당해 농부가 "노동자들"(91p)이 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가능하다.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통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농부는 더 이상 그러한 순수한 의미의 농부가 아니다. 농토는 대부분 거대자본에 의해 잠식당해 "농부들은 노동자들이 됐"(91p)다. 농부들은 농업 그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팔리는 상품' 즉, '돈이 되는 상품'에 주력하게 되고 그것을 수매하는 거대한 기업들에 의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는 말이다. 르네 듀보의 '의미 있는 노동의 상실'이란 이곳에 곧장 적용된다. 옛 봉건제도 하에서의 '지주-소작농'의 관계는 이제 '(대체로) 거대 다국적기업-소작농(농업 노동자)'로 대체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지주'와 '다국적기업'의 역할 상의 차이다. 옛날의 '지주'는 (원칙적으로) 소작농으로부터 일정한 소작료를 받고 그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다국적기업은 다르다. 어느 때고, 자신의 고용인(농부)을 해고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다분히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다. 환경론적인 지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약은 원래 의도했던 곤충들뿐만 아니라 (그 해충을 잡아먹는) 유익한 곤충과 그 밖의 무척추동물들을 대량으로 죽여 버린다.(75p)

 

  우리는 농약의 유독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켜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조금씩 먹으면 서서히 죽어간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살아간다. 누군가 당신에게 반쯤 벌레가 먹은 사과를 내밀며, "먹어보시오."라고 권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손사레를 치며 거절할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동생이 사과 반쪽을 내밀었는데, 어찌나 벌레가 많이 먹었던지 징그러울 정도였다. 이에 내가 투덜거리자 어머니께서 한 마디를 하셨다 : "그래서 옛날에 썩은 복숭아는 밤에 먹었단다. 벌레 먹은 사과가 몸에 더 좋단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과를 다시 베어물수는 없었다. 이런 내게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난 반세기 동안 농약을 살포했음에도 우리는 단 한 종의 해충도 박멸하지 못한 반면 더 강력한 벌레들을 키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76p)

 

이러한 유독성 물질의 사용은 토양마저 황폐화시켜 버린다. 토양은 각종 유기물들이 집합체이며, 각종 생물들에 의해 숨쉬고 그 명을 유지한다. 그런데 화학성 유독물질은 이 토양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여버린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땅으로 스며든 유독물질은 지하수로, 강의로 흘러들어 결국엔 우리에게로 돌아오고 만다. 이는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헌데 어른들은 잊고 산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환경 상식을 망각하고 사는 어른들이 참 많다.

 

  3. 베이트먼이 4대강 사업을 목격했다면.
  이 책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또 있다. 이것은 조금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는데, 바로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 대한 문제다. 한국의 정치 상식에 근거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저자의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지점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는 대체로 '벌목업자'나 그에 동조하는 정부, 토론토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는 건설업자, 멕시코의 사이잘삼 거대 플랜테이션을 짓고 운영하는 집단 등을 '진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하여 '환경생태론자'들은 '보수'가 된다. 한국 정치인들의 용법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자신들을 '보수'라고 자칭한다. 민주당을 비롯한 '4대강을 반대하는 쪽'은 자신들을 '진보'라고 자칭한다.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현상을 나타내는 언어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베이트먼이 '4대강 사업'을 바라봤다면 어떤 쓴소리를 했을까. 환경영향성 평가는 6개월만에 졸속으로 끝내버리고, 심지어 수중보의 안정성 테스트(수리 모형) 역시 유야무야 넘겨버린 그 사업을 어떻게 바라볼까. 정부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강의 생태를 살리는 일이며,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우리는 강의 생태가 결코 '토목공사'로 살아날 수 없으며, 그 이면에 '운하건설'이 숨어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적으로 보탬이 된다'는 주장 역시 얼토당토하지 않음을 안다. 결국 4대강 사업에서의 '일자리 창출'이란 '일용직 일자리 창출'인데, 그것이 정상적이란 말인가? 베이트먼은 이에 적용할만한 이야기를 한다.

  환경파괴의 대가를 금전으로 환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자연 자연과 생물학적 보존 체계의 총합인 '자연 자본'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낡은 방식의 경제학을 악명 높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연간 국내총생산, 즉 GDP를 측정하는 정부 내 통계학자들이다.(109p)


  이러한 논리의 통계학자들은 "한 나라의 경제 '생산'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교환되면서 돈을 만들어내는 것들뿐"인 것이다.  하지만 GDP는 지하 경제를 완전히 무시한다. 예를 들어 주부의 가사노동이나 자원봉사자들의 무임 노동은 완전히 무시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산 활동'을 셈에 넣지 못한다.


  GDP는 생태계에 파괴를 유발하는 상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110p)

 

  100만 달러를 가지고 나무를 심는 데, 혹은 지역 석탄 발전소에 매연 정화기를 설치하는 데 쓰든, 아니면 숲을 벌목하거나 풍요로운 경작지를 포장도로로 만드는 데 쓰든, GDP가 올라가는 것은 차이가 없"다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공해 하이브리드 차를 만드는 것과 공해배출 물질을 생산하는 것 사이에 차이는 없는 것이다. "GDP의 불합리한 잣대에 따르면 유명한 엑손 발데즈(Exxon Valdez) 사건처럼 그 모든 기름 유출이나 발암 물질 생산 등 감옥에 들어가야만 하는 범죄가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된다.(111p)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산업과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파괴조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폐해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는 저자의 말마따나 "고삐풀린 자본주의"였다. 허나 벌목사업을 위해 임의로 키워져 베어지는 나무나, 생존과 적당한 번영을 위해 바다를 개척한 네덜란드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지속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고삐풀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지구 하나만으로는 그 체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환경에 대한 걱정이자 우리 체제 우리 인간에 대한 저자의 걱정이다.
  저자는 마지막 3부에서 이러한 기존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한다. 3부의 제목도 '희망의 신호'이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스위스 어떤 마을 사람들의 자연주의적 태도'와 '하이브리드 차'와 같은 자연친화적 산업, '도시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면서 환경을 보전하는 태도'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환경주의자이기는 하지만 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개인적 경험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진정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허위와 허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환경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고뇌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가며 - 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조화와 균형을 그 원리로 한다. 조화와 원리는 안정이며 초자연적 파괴-예를 들면, 신의 분노-가 있기 전까지는 무한하다. 동양의 불교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진작에 깨달았다. 불가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하는데, 이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거스름'이다. 우리는 생노병사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안 늙고, 안 아프고, 안 죽으려 한다. 욕심 때문이다. 그런 욕심 때문에 자연도 손상이 된다. 욕심은 욕심을 부르고 그러한 악순환이 무한히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자연은 회복불능 상태가 되어 피의자인 인간마저 파괴하려든다. 괴로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자연은 순리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강토에서는 유래 없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건축업자가 시장이 되니까 수도물을 '전기모터'로 퍼와 시멘트 하천 모형 '청계천'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더니, 이제 그가 대통령이 되자 국토의 모든 강을 '청계천'처럼 만들려고 한다. 지성인들의 피맺힌 성토도, 국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도, 심지어 나라의 이름을 걸고 2006년에 조인한 '람사르 협약(습지 보호 조약)'까지 대통령은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일본의 하천 전문가들은 얼마 뒤 이를 국제적인 공론으로 만들겠다고 했단다. 직접 보고는 차마 눈뜨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토목업자들의 이익대변인인가? 국토가 어떻게 되든 토목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강토를 파괴하고 국민을 우롱한 지도자는 반드시 훗날에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2010년 7월 10일)

 

* 2010년 7월 10일, 이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