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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사각형

[영화]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가? -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 감독)

* 직접적인 스토리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 비난
비난 일색이다. 이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평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잔인하다. 단지 그뿐이다. 그들의 현장에서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은 '고어물 중독자'로 낙인 찍히기 쉽다. 심지어는 '병신', '사이코'라는 원색적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비평 현장의 모습인가? 물론, 내가 목도한 건 전문가가 아니라 네이버라는 일반인들의 공간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라하여 반대를 처단하고 끌어내어 추방해야 하는가? 나 역시, 영화광도 아니거니와 비평가는 더더욱 아니지만, 단지 '잔인하다'라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비난하고 헐뜯고 짓밟는 건 좀 무식하지 싶다. 물론 '잔혹'에 대한 혐오감은 인정한다. 그점은 나도 동일하게 느꼈다. 그러나 영화는 그 '혐오감'을 완벽하게 관객에게 어필했다. 영화가 어설프지 않게 '잔인함'을 관객에게 어필했다면, 그리고 극중 NIS 요원으로 분한 '이병헌'에게서 '진짜 악마'를 느꼈다면, 그건 분명히 잘 만들어진 영화를 방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관객은 드물었다.

#. 이 영화를 고어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고어물이 아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영환 '고어'라고 하기엔 굉장히 싱거운 축에 든다. '고어'란 모름지기 잔혹한 장면-이라고만 하기엔 역겨운-을 편집이나 오브제 배치 등의 테크닉적 변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 고어에는 예술도 없고 미학도 없다. 쓰레기다. 범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 한 번도 '고어'라고 부를만한 '직접적인' 장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범죄 유형은 오로지 '성폭행 이후의 토막살인'(최민식의 친구의 경우는 예외다. 게다가 그 친구의 범행장면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차례 등장할 뻔하지만 미수에 그친다.)뿐이다. '고어물'이라면 아마도 '토막'의 현장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드러내지 않는다. '순간'의 전과 후, 그것만을 보여줄 뿐이다. 드러냈다면 그 순간 영화로서의 가치를 잃을 테니까.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범죄의 순간'은 없지만 피가 튀고, 잘린 사체가 사체가 나뒹구는데 고어가 아니냐고. 이런 반박은 좀 우습다. 그런 논리라면 '고어'는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렸기 때문이다. 나는 사극에서도 잘린 머리를 본 적 있다. 외국 사극이 아니라 엄연히 우리나라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는 '사극'에서 말이다. 사실 그런 장면은 흔하다. 잘린 귀, 잘려나간 손목, 활 맞는 장면은 대놓고 등장하고, 생살을 꿰매는 장면은 비장한 음악과 함께 가감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 이것은 고어인가?

#. 인간 본성의 반동형성
우리가 이러한 장면들을 용납하는 이유는 '오브제'로서 전체 플롯의 부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잔인'도 스토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으면 용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화 외부의 일례를 들어보자. 1990년 대 소설들을 기억하는가? 90년대을 흔히 '여류작가의 시대'라고 일컫는데, 이 시기에는 '동성애', '자살', '불륜', '청부살인' 등의 소재들이 아주 판을 쳤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 환호했고 읽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반동형성(反同刑性)'과 마주한다. 인간 본성에는 '반동형성'이라는 본래적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파생되는 결과물에 대한 이론(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다시 말해 본성의 파생물은 '사랑-미움', '건설-파괴', '선-악' 등과 같이 상호대립적인 성질의 것으로 언제나 대응하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의 특징은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 있다. 이 양립한 두 개의 파생물 중 하나가 직접 혹은 초자아를 통해 자아를 자극하고 침범하면, '자아'는 자기 방어의 매카니즘을 펴게 된다. 그것은 대개 무의식으로 올라온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쟤가 싫어'라는 감정이 무의식에서 발현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나는 쟤가 좋아'라는 문장으로 그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을 막는다. 이것은 대개 도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작용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다. 예외는 사이코패스 따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 속 '이병헌'은 사이코패스가 분명히 아니다. 그가 국가정보기관인 NIS 요원이라는 설정은, 그가 얼마나 '정상적인'인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정황증거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신에 이르러서 우리는 깨닫는다. 그 정상적인 '이병헌'이 사실 '진짜 악마'라는 것을. 진짜 사이코패스인 '최민식'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최민식'과 특히 '이병헌'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김수철'을 기억하는가? 그를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공공연히 말했는가. 그를 죽여야 한다고. 대중의 손으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들의 말은 '도덕'에 가로막혔다. 인권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도 다 도덕일지니.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의 진실'이 사실이 '도덕'이 아니라 '복수하는 자' 이병헌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얄팍한 도덕률'에 의거해 이 영화를 헐뜯는다. 단지,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행위 아닌가? 자신들의 음습한 본성을 감추기 위해 이성으로서 도사리고 있는 도덕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기능으로서의 그것을 말살하려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각인의 내부에 옹송그린 본능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본성을 바로 목전 앞에서 맞닥드리게 한다. 그리고 그 본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까지 보여준다. 이만하면, '영화'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 (추가)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어떠한가?
<나는 악마를 보았다>를 간단히 '복수극'이라고 할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다. 연식대로 거론하자면,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가 그 시리즈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아시다시피,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는 '최민식'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들을 떠올린 까닭도 그런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들과 비교해가며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