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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의 사각형/생각들

읽고, 울컥한 글 : "에코세대에게 청춘이란?"

읽고, 울컥한 글이다.

아트앤스터디에서 발행하는 '지식메일' 제297호에 실려있다.

 

에코세대에게 청춘이란?

 

'청년'은 정서적으로 젊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서 긍정적이고, '노인'은 고루하고 허약해 부정적이라는 일반화된 이미지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의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도 대부분이 활기 넘치는 청년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나이가 든 모델을 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중년이나 노년층의 모델은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노쇠한 이미지를 자신의 제품 브랜딩에 사용하고 싶은 광고주는 없을 것이다. 노년의 모델이 나오는 경우는 (제약 광고를 제외하고) 최근 한 금융 광고의 송해 선생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우리는 끊임 없이 '젊은이'라는 기표를 호명하며 에너지를 얻는다. 젊다는 것이 훈장이자 명예이고 나이 듬은 패배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렇게 젊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상품화된 젊음이 남은 것이다.

 

수많은 문장가가 청춘을 썼고, 노래하는 이들이 청춘을 불렀다. 영화감독은 청춘 영화를 만들어 빛나는 시기를 스크린에 상영했고 고 故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부르며 지나간 청춘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나같이 모두 청춘의 소중함과 열정을, 꿈을 말한다. 대대적인 생산물의 타겟인 청년은 실제로는 이 문화산업의 코너에 몰려 있다. 청년을 상징하는 것들로 도배된 타임라인을 보며 좋아요만 누르면서 정작 정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앞에서는 멈칫거린다. 우리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사실 근래의 청춘 열풍은 안정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는 앞선 세대의 노스탤지어나 환영처럼 느껴진다. 청년은 이들에게 소모되는 소비재이다. 기어코 성장한 세대가 비루한 앞날을 향해 성장할 세대에게 희망의 위로를 던지며 내가 이들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위로를 받은 청년은 앞선 세대처럼 자라기 위해 애쓴다. 앞선 세대의 소비 방식을 따르고, 앞선 세대가 되어 뒤를 잇는 세대에게 조언하길 빈다. 이런 상황의 청춘과 청년의 환상은 깨어져야 한다.

작금의 젊은 세대는 돈의 지배에 도전하는 모든 가치관이나 윤리적 신념을 조롱하고 비웃고 파괴하는 암살자들을 숭배하고 있다. 이 세대는 향긋한 비누건, 아로마테라피건 뭐가 되었든 사치스러운 것으로 씻어낼 수만 있다면 설령 손에 피를 묻히게 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탐욕의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특히 취약하다. 진정한 정체성, 신념 체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관계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부가 모두를 기다리고 있으니 상상만 하면 된다는 끔찍한 유혹을 떨쳐 낼 수단이 없다. 그들은 억압자들을 죽일 수 없다. 누가 억압자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급 정치학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도 모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돈이 없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뿐이다.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일명 에코세대라 불리는 현재의 청년은 정치에 냉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행에 민감한 20대, 세련되고 쿨한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정치적인 행동 또한 모호하다. '중립'이라는 멋진 말을 쓸 수 있지만 실제로 청년이 판단하는 것에 중립이란 없다. 개개인의 선호가 분명하지만 예민해질 수 있는 사안, 혹은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만 중립을 선언한다. 그렇게 중립은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 된다. 옳고 바른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았지만 정작 사회에 나왔을 때는, '원래 그런' 세상 앞에 절망하고 만다. 젊은이들은 이 절망 앞에 생각할 겨를을 잃었거나, 생각함에도 달라지지 않아 자의적으로 냉소를 택했을 것이다.

언제적 88만원 세대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호칭이다. 밀린 학자금으로 취업이 곧 생존이 되었고 공포와 불안 속에 정치적으로 옳은 것, 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중요한 일, 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묵묵히 제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모두 내 탓이야 중얼거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곤 앞선 세대의 마약과도 같은 위로에 위안을 얻는다. 어디서부터 이 위로의 순환이 시작된 것일까? 도통 알 수가 없다.

가능성, 건강, 시간을 갖췄지만 모든 것을 착취당하고야 마는 청년. 일상적이고 안정적인, 혹은 다이나믹하고 열정적인 삶을 꿈꾸지만 이 삶은 먼 미래에 있다. 분명 택할 기회들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

누군가의 노스탤지어도 되지 않고, 누군가의 쓰고 버려지는 노동력이 되지도 않고, 자본주의 활력소의 주축이 되지도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청년의 삶'은 진정 어디에 있을까? 분명 이보단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냉소적이지 않은, 무관심하다고 욕 먹지 않는 그런 진짜 '청년의 삶'

참고 강의 김선희 <각도와 층차 : 여덟 가지 개념으로 만드는 작지만 단단한 철학지도>

Written by heyleeyu (heyleeyu@artnstudy.com)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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