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우리나라'란 분단 이전의 식민지 조선을 지시하므로 지금/여기의 관점으로는 남과 북을 포괄하는 단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단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 대해 천착하자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비근한 예로, 1945년 8.15는 '한국의 광복'인가 '조선의 광복'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광복'인가. 그래서 재일교포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괄하여 '코리아'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쓴다고 하던가.
나는 편의 상 '우리나라'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문학 계보를 논함에 있어, 특히 해방 전의 문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남과 북의 불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광수의 <무정>만큼은 한국 근대 문학의 포문을 연 '정전(Canon)'으로 남과 북을 불문하고 인정되는 바, '국호'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를 보류해도 좋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무정>의 문학사적 위치는 대단하다. 우리 근대 문학을 통시간적으로 개괄하는 데에 있어서 <무정>은 단연 첫 머리에 온다. <무정>은 소위 '신소설'로 불리던 과도기적 소설에서 한국 소설을 탈피시키고 새로운 시대 즉, '근대 소설'의 세계로 그것을 진입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인직의 <혈의 누>, <귀의 성>, <은세계> 같은 '신소설'들은 기실 '근대 소설'의 부류에 편입시키기에는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무정>의 저자 이광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고 그 깨달은 바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구현하여 한국 근대 소설의 장을 개막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무정>은 근대 소설인가. 이 문제에 답하여야만 <무정>의 가치는 드러난다. <무정>이 정전이된 까닭은 그것이 '근대 소설'이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근대 소설'인 까닭이 규명되지 않고서는 정전의 지위는 의심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because of, '구 도덕'의 몰락과 '주체의 등장'
도덕이란 인간 외부에서 인간 전체를 규정하는 사태다. 전 근대 사회에서, 그것은 확고부동하고 항구하여 인간을 지배했다. 조선 사회의 '유교'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유교적 도덕이라고 하는 것 예를 들면, '정절'이라든지, '충효'라든지, 하는 것들은 '항구하는 것'이었고 '항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속에서 '개인'이라든지 '주체'라든지 하는 것은 무시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규정을 단연코 거부한다. 근대는 '개인'과 '주체'에 의해 성립되었고 끊임없이 그것을 발견하는 상태이기 대문이다. 이러한 근대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도덕은 그 명맥을 유지하되 예전(전 근대)만큼 그 영향력을 지속할 수 없다.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 역시 이러한 구조적 원리를 충실하게 반영하여왔다. 전 근대 서사문학(이 용어 역시 '근대'적이기는 하지만)에서는 개인과 주체를 다루는 경우가 드물었다. 4서 3경 따위의 경전이나 각종 열녀전, 심지어 민간 소설이라고 불리는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에서 역시 '도덕'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 했다.
그러나 <무정>에 이르러 소설은, 드디어 '개인'에 포커스를 맞추기 시작한다. <무정> 속 주요 인물 즉, 형식, 선우, 선형, 영채 등은 구 도덕에 안주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 중 '영채'는 주목할만 한데, 소설의 중반부까지 그녀는 '구 도덕'의 화신으로 그려졌으나 소설 말미에는 그녀마저도 근대적 인간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시종일관 묘사되는 '형식' 역시 그 스스로 '선각자'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기실 인간적 고뇌로 가득 찬 한 '인간'일 뿐인 것이다.
지라르, 벤야민 등이 말했듯 근대 소설 속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갈등하는 '아이러니'의 존재라고 할 때, <무정> 속 인물 군상들은 모두 그러한 대의 전제에 부합한다. 형식은 은인의 딸이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고, 심지어 영채가 죽었다는 소식에 은근히 '홀가분'해하며, 성적으로 매력적인 '선형'을 선택하는 행위는 전 근대 서사문학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물 유형인 것이다. 영채의 변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돌연 그녀가 기차 안에서 '구 시대의 전형'에서 '근대적 여성'으로 전환되어 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전환과 맞물려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상기한 것이 <무정>이 '근대 소설'로 평가 받는 유일한 사유는 아니다. 그러나 <무정>은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근대적 인간'을 소재로 삼고 철저히 '근대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바, 그 문학사적 의미가 특히 '우리나라' 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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