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문장] 휘청거리는 오후, 박완서,137-545페이지

 

 

고뇌하던 아버지는 결국 딸아이에서 압수한 세코날 한 주먹을 집어 삼키고 자살을 한다. 그를 그토록 괴롭게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 여자들의 허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었을까? 그러나 소설은 단칼에 구분지을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치밀하게 그려낸다. 특히 심리과 관계에 대한 박완서의 묘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를 서글프게 하는 것은, 1977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이 장편소설 속의 내용이 내가 딛고 서 있는 지금/여기 2012년의 풍속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몇몇 구절들

 

- 상처받은 순정이라면 또 몰라.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도 우리가 슬슬 기며 아물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아빠는 137

 

- 이건 고통도 아니고 난관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속이 소리 없이 썩어가고 있는 상태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면서 외모가 밉고 끔찍하게 늙어갈 뿐인 것이다.

  허 성 씨는 세상의 늙은이란 늙은이가 왜 그렇게 미운지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여태까지는 그 미운 외모가 늙은이 스스로의 책임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식들 때문이었어. 순전히 못된 자식들 때문이었어.

  아까 우희가 몇 번이나 거듭해서 자기가 비참하다고 호소했지만 정말 비참한 건 허 성 씨다. 딸이 순결을 잃었다는 것. 그런 딸 년을 흠뻑 두들겨주거나 저주하지 못하고 참는다는 게 이렇게 비참한 노릇인 줄은 허 성 씨도 미처 몰랐었다. 첫사랑의 애인이 순결을 잃은 걸 알았을 때의 청년의 심정인들 이렇게 비참할 것 같지는 않았다. 154

 

- 그리고 이를 악물면서 그녀가 자기 결혼에 대해 세우고 있는 불변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부동한 원칙, 그것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부자여야만 한다는 거였다. 241

 

- 그의 깜박이는 의식이 아주 사그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찬란하고 강렬하게 타오른다. 어떤 치욕도, 어떤 불명예도 죽음보다는 나으리라는 의식이었다.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