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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퍼 나르기/공모전&투고

[2008] 백범의 몸을 심지로 삼아 조국의 빛이 되다 <백범일지>(김구)(공모전)

* 2008년 5월, 이등병 시절에 <백범일지>를 읽고 독후감 대회('백범일지 독서감상문 대회',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주최)에 응모, 최우수상을 받다.


창암의 작은 가슴이 지핀 애국의 불꽃,
백범의 몸을 심지로 삼아 조국의 빛이 되다

종종 눈물이 나곤 했다. 유쾌한 시(詩)를 읽으면서도 문득, 발랄한 음악을 듣다가 어디에서 내게 닿았는지 모를 우울함 때문에 문득, 한겨울 지하도 안에서 마주친 노숙자를 보며 또 문득, 서글펐다. 사춘기 소년처럼 모든 소리가 간지게, 모든 풍경이 미세한떨림을 갖고 찾아오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 그 시기가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던 그 경계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맞았던 초봄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창경궁 담벼락을 따라 혜화동으로 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전과 다른 감정을 체험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한 것은 서울대병원 앞에서였다. 흰 상복을 입은 어느 여인의 통곡이었다. 그 풍경에 내 가슴이 아플 만큼 옥죄어왔다. 그때 나는 그전까지의 모든 서글픔 혹은 눈물들이 치기 어리다는 생각을 했다.
   백범일지를 받아든 순간의 느낌이 그러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스무 살의 봄에 서울대병원 앞에서 흰 상복을 입은 여인의 통곡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상이었다. 때 아닌 감정이 내 가슴을 억눌러오는데, 나는 처음이 아니면서도 그 느낌이 퍽 낯설었다. 나는 백범일지의 표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표지 가운데에 아로새겨진 '白凡逸志', 네 글자. 그리고 그 오른쪽에 박힌 백범 김구 선생의 존영. 단지 그뿐이었다.
   백범일지의 첫 페이지를 펴들었다. 백범 선생은 책의 맨 앞에 <백범일지>를 쓰는 까닭 즉, 서문을 써놓고 있었다. 그 짧은 서문은 또한 그가 아들들에게 남기는 편지이기도 했다. 그 서문을 읽는 동안 가슴이 아리고 시렸다.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써내려 놓은 그 글자들에서 나는 백범 선생의 고아하면서도 강렬하며 동시에 비장한 그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담담히 써놓은글에서 비범함을 느낀다는 것. 역설이지만 내가 느낀 사실이었다. 선생은 백범일지를 유서(遺書)라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나이 어린 인과 신, 두 아들에게 남겨놓은 아버지의 유서. 망국의 백성으로서 응당 나서야 할 바를 알고 한 떨기 들풀 같은 목숨을 걸고 있다는 그 말씀. 나는 백범일지가 김구 선생이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서이면서도 또한 대한의 백성들에게 선생이 남기는 격서(檄書)임을 직감했다.
   백범 선생은 한없이 겸손했다. 당신 스스로의 외모를 더러 못 났다, 못 났다, 하시고 큰 인물은 못 될 상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잘난 것이 없어 다만 바란 것이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셨다. 우리가 다 알건대 백범 선생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중국의 손문, 베트남의 호치민과 같은 한민족의 국부적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존재라면 당신 자신을 어느 정도 포장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설사 포장한다 하더라도 흠잡지 못할 터인데, 외려 백범 선생은 한 없이 겸손하고 솔직했다. 감옥에서의 추태, 속으로 품었던 사심(邪心) 등 구태여 드러내어 놓지 않아도 될 것들을 선생은 가감 없이 써놓아 한 치의 거짓도 쓰지 않으려 하셨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만은 대한사람이면, 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곱씹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명은 창암 혹은 창수였다. 백범 선생은 자신의 어릴 적을 소회하며 당신의 비범함을말하는 데에 주력하지 않았다. 외모는 못 났고, 체격도 뛰어나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린 창암은 행동했다. 선생은 어릴 적 자신을 미화하는 대신 자신이 걸었던 행적과행동들을 거짓 없이 써놓고 있을 뿐이었다. 고능선 선생에게 배운 척양척왜(斥洋斥倭) 정신, 변복한 일본인 육군 중위 스치다를 기지를 발휘해 치하포에서 죽인 사건, 그리고 척양척왜 정신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동학으로의 입교, 동학으로의 입교 후 병력을 이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화 등을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때 그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다. 내가 길거리를 걸으며 치기 어린 감상에 젖어있던 그 나이. 어린 김구, 창암은 전쟁터에 있었다. 백범 김구는 말보단 행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나는 아래 구절을 떠올린다.

  "... 작은 일 하나에도 양심을 본위 삼았고 사심이 발할 때마다 먼저 자신을 꾸짖지 않고는 감히 남의 잘못을 꾸짖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으로 되었다. ...모든 일에 자기로서 비롯하여 남에게 이르는 것이 일상적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양산학교 교장으로 지내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기왕지사를 술회하던 부분의 일부이다. 인상 깊고, 또한 백범 선생의 행적을 돌아보건대 이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 수첩에 적어두었던 구절이다. 선생은 이 구절에서 양심을 본위 삼으셨다 했다. 내게서 나서 남에게 닿는 것이니 나부터 양심을 본위 삼아 심신을 청정히 하고 남에게 일러야 한다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자신을 뽐내고자 이 구절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양산학교의 교장 즉교육자로 지냈으며, 십 수 년 간 예수교의 신자로서 성경을 공부해왔으면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이후 금수(禽獸)처럼 변해갔던 자신의 모습을 힐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술회의 한 부분을 기억한다. 간수가 수갑을 세게 채워 살이 갈라지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본인 간수에게 애걸할 수 없다하여 참는 그 장면. 일본인 간수에게 불려나가 모진 매를 맞다 평생의 상처로 남은 짝짝이 귀. 발가벗겨진 채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료의 이름으 토설하지 않는 모습. 자신에게 들어온 사식을 입에 물어와 같은 방 안에 투옥되어 있던 이정록이란 젊은이에게 먹이는 애틋한 모습 등등. 그것은 백범 당신이 감추어두려 해도 드러나는 주머니 속의 송곳인 것이다.
   갑작스런 가석방 이후 그에게 남겨진것이라곤 고문 흔적들로 얼룩진 몸뚱어리뿐이었다. 양산학교는 일본인들에게 강탈 당했고, 딸아이는 아비를 기다리다 죽은 후였다. 또한 옥에서 소위 도적들을 만나 인간사회의 이면을 발견한 뒤였다.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품었던 교육의 꿈은 송두리째 강탈 당했고, 애지중지하던 딸아이는 죽었지 않은가. 그러나 백범 선생을 더욱 절망스럽게 했던 것은, 이른바 독립운동가라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만난 도적들만도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곧 기미년 만세운동(3.1운동)을 겪은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더 큰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다 알듯이 그 시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지 않았던가. 백범 선생은 너절해진 몸을 이끌고 안창호에게 찾아간다. 다만 임시정부 문지기로 써달라고 간청하기 위해. 백범일지 상권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감옥에서 청소하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우리 정부의 정청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면. 말로 그치지 않고 그는 진정,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애국의 절박한심정이란 구구절절한 말에 있는것이 아닌 바이다. 그렇게 임시정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백범 선생은 이승만이 떠난 후 임시정부의 국무령 그리고 주석이 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잘 알듯,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각각 한 기씩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그대로 미국에 항복기를 든다. 우리나라로써는 갑작스런 광복이었다. 광복군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무력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백범으로서는 허탈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국 고아복을 마냥 허탈한 심정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선생은 무력이든 비폭력이든 자신이 추구했던 것은 결국 조국의 광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껏 부푼 마음과 우려의 마음을 동시에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고국은 '나의 소원'에서 그토록 절절하게 그려놓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몇 번을 묻던 백범 선생 당신의 소원은 '조국의 자주 독립'일 뿐이라 했다. 자주는 곧 자력(自力)으로 한없는 문화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해방조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사회 도처에 뿌리박고 있던 친일파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충돌, 민주주의 내에서의 싸움, 또 그 싸움 안에서의 싸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시국 속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그가 지나왔던 길과 같이 주장하고 또한 실천했다. 조국은 둘일 수 없다며, 하나여야 한다며, 그는 뛰고 또 뛰다,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하시고 말았다. 나는 '나의 소원'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곱씹어본다.

  "...우리 동포, 즉대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할래야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위 구절은 백범 선생의 조국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희망이다. 좌우로 나눠 싸우고 당과 당으로 나눠 싸우고, 이쪽저쪽 나눠 싸워대는 조국의 모습을 에둘러 한탄하며 희망을 역설하신 것이다.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천하가 이기심으로나를해할 것이라는말씀. 광복 후 조국의 어수선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선생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가 추구했던 조국의 나아갈 길에 대한 가슴 찡한 비유를 상기한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공원의 꽃을 꺾을 자유가 아니라, 공원의 꽃을 심을 자유다. ..."

  십대 후반, 가슴속에서 피어오른 불꽃을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꽃을 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십대 후반, 그 어린 나이에 붗을 꺾고 막연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성급하지 않게, 한 계단씩 독립운동의길을 찾아 나섰다. 서구의 사도행전이 예수를 알리고 그의 가르침을 지키려는 사도들의 행기라면, 난중일기가 난세영웅 이순신 장군의 자서전이라면, 백범일지는 우리 접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경전적 행기이며 자서전이며 격서인것이다.
 
  입으로만 싸우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라도 입으로만 위한다. 구한말, 일제강점기는 물론 오늘날에도 말이다. 그들을 말로써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하나 그 안에 행동은 대체로 없다. 뭇 사람들은 그들의 허황된 수사를 오래 가지 앟아 무시하며 행동 없는 말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범 선생의 행적은 더욱가슴이 저린다. 창암의 작은 가슴에서지펴진 작은 불꽃을 백범은 당신 한 몸, 당신의 모든 것을 심지로 삼아 불태웠기 때문에. 실천했기 때문에. 망국의 설움을 폭탄으로 삼아 그것을 가슴에 안고 고해(苦海)의 세상에 투신하진 그 분! 그의 손목에 남은 상흔과 모진 고문에 찌그러진 양 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에 몸을 갈아대며 나라와 백성들을 끌어안으신 그 분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08.3 군 복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