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퍼 나르기/공모전&투고

[2010] 1910년, 충숙공에게 어미가 부칩니다(공모전)

2010년 11월, 외교통상부에서 주최한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 글짓기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다.


1910년, 충숙공에게 어미가 부칩니다

 
一. 어미는 상제의 곁에 있습니다.

어밉니다. 이제야 서간을 쓰게 되었네요. 공의 어미는 상제(上帝)의 곁에 와 있습니다. 지난 경신년(1380)에 흉악한 왜구들에게 붙들려 낯선 땅으로 갔던 이 어미는, 차마 굶주림과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이승의 끈을 놓았습니다. 슬퍼 마세요. 어미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나, 언제나 내 사랑하는 아들 ‘예(藝)’의 전 생애를 지켜보았습니다. 다만, 오매불망 이 못난 어미를 찾아다녔던 그 지극한 ‘효심’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찾지 마세요. 아직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예 역시 천상(天上) 어딘가에 계실 터이니 필경 만나게 되겠지요. 그래요, 모자의 정이니 곧 만날 겁니다. 저승의 시간이야 또 금세 지나가겠지요.

이번 양력 1910년에 즈음하여 순종 황제께서 공에게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내리시었습니다. 공이 졸(卒)하시고, 수 백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받은 시호이지만 이 나라 조선이 공을 잊지 않았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공은 살아생전 어미를 그리던 지극한 효와 군왕에게의 충성, 백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품었으니, 뒤늦은 시호의 하사가 어미는 아쉽지 않습니다. 또한, 저승에서의 수 백 년이야 단지 눈 깜빡할 사이일 따름 아니겠습니까? 이 나라 조선이 공을 찾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겠습니까. 망국의 기운이 천하에 뻗어있으니, 옛 영광을 찾는 것이지요. 또한 망국의 원흉이 ‘왜인’들이라는 것도 공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나라는 공의 치적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하고 있는 거예요.


二. 667명의 백성을 쇄환(刷還)하신 공의 애민애족에 눈물이 납니다.

지난 병자년(1396)에 왜구에게 억류되신 울산 군수를 구출하러 가신 일은, 참으로 잘했습니다. 대저 사내란 충의(忠義)를 굳게 알고 바르게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그것은 신의입니다. 신하로, 그 주인에게 은혜를 받았으니 응당 보은해야지요. 그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공과 어미는 너무 일찍 헤어져 이러한 이치를 알려주지 못하였으나, 도리어 잘 알고 계시더군요. 특별히, 왜구와의 담판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어찌 그리도 용맹하며 동시에 침착하셨는지요. 화는 일을 그르치는 법이지요. 사실, 어미로서 조마조마하였으나 마땅히 도리를 알고 지키는 아들을 보며 뿌듯했습니다. 임금께서 공을 가상히 여겨 벼슬을 주고, 중인 신분을 벗어나도록 하였을 때는 어미의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공이 여덟 살 나던 때에 혼자 두고 이렇게 저승으로 온 뒤로 가슴이 편한 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공은 조정의 관리가 되셨지요. 조정의 관리가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충심에 어미는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특히, 경진년(1400)에 ‘일기도(一岐島)’로의 파견을 회계사 윤명 영감이 명받자, 공은 자진하여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지요. 그 멀고 험한 길을 택한 것이, 이 못난 어미 때문이었다지요? 어미를 찾겠다고 그 고된 여정에 동참하였으니 그 효심이 지극합니다. 더군다나 대마도주와의 사적 관계로 억류된 윤명 영감을 대신해 일기도로 가서 조선 포로를 구해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정사(正使)도 아닌 수행원의 신분이었으니 아마 모든 일은 공의 ‘애민 의식’과 ‘충효’가 적장을 감복시켰기 때문일 테지요.

그 일로 조정도 놀라 이듬해(1401)에 바로 공을 정식 회례사로 파견하였지요. 이때에도 순탄치 않아 어미가 가슴을 많이 졸였습니다. 아마, 일기도로 다시 가는 길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그곳은 왜구의 소굴입니다. 대마도주가 귀양을 가고 없는 사이에, 왜구들은 더 길길이 날뛰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 왜구들이 공과 일행의 배를 훔쳐 타고 달아나더군요. 공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런데 공은 그 경황없는 와중에 도리어 조선인 포로 50명을 쇄환(刷還)하여 돌아오시더군요. 경황이 없는 중에도 백성들을 살피셨던 것이지요. 어미는 공의 백성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사모합니다. 이로써 중인이었던 공이 종5품 좌군부사직을 제수하였으니, 어미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뿐입니까. 병술년(1406)에는 사절단의 정사로서 회례관이 되어 직접 일왕을 친견하고 조선 포로 70여 명을 쇄환해 오셨지요. 그렇게, 외교관으로 조정에 오르신 40여 년 동안 총 667명의 포로를 쇄환하신 겁니다. 어미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어요. 기쁨의 눈물이었지요. 비록 이 몸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나와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내 아들이 구출한 것이니까요. 이는 어미를 그리는 효성과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충심과 무엇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공의 노년까지 그 마음 잃지 않았으니 대견스럽습니다.


三. 공의 마음이 충성스럽고 따뜻하니, 임금이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는지요.

공이 세수 일흔네 살 나던 때에 졸하였으니, 임금은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후에 실록에 공께서 무려 75회나 거론되셨다 하니 공에 대한 조선의 사랑과 임금의 지극한 믿음이 보입니다. 물론 그것은 모두 공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겠지요. 공께서 모신 태종 임금과 세종 임금이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분 임금께서는 천부적으로 명민하시어 사람의 마음을 꿰뚫으시는 분들입니다. 다시 말해, 표리부동 하는 자는 금세 간파하여 신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두 임금께서 공의 일생과 졸하심을 유심히 지켜보셨으니, 어찌 공의 충의(忠義)를 의심할까요.

두 임금은 지극히 백성을 사랑하시었지요. 아마, 공을 사랑하신 것도 충심도 있을 것이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아마도 공의 애민 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임금은 군왕의 자리이니만큼 백성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을 터이니, 두 임금은 얼마나 답답하였겠는지요. 그런데 공은 마른자리, 진자리를 가리지 않고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버선발로라도 나서시는 분이시니 두 임금께서는 공을 깊이 신뢰하시게 된 것이지요. 자랑스럽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공의 세수 일흔한 살 되시던 해, 1443년이었지요. 그때에도 조선인 다수가 대마도에 포로로 끌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고뇌하셨지요. 그들을 구출할 방도를 말이에요. 조정에서 일본 ‘전문 외교관’은 공이 거의 유일했으나 너무 노구였던 것이지요. 어지신 임금은 차마 늙은 공에게 하명을 하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때에 공께서 성상께 올린 말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다만 성상께서 공이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삶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종사(從事)할 사람을 가려서 소신을 보내도록 명하시면 피로된 사람들을 죄다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공의 마음이 이러하니 세종대왕이 어찌 신의와 존경으로 공을 대하지 않았겠는지요. 세종대왕의 말씀도 기억납니다.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을 하시고선 성상께서 친히 ‘갓’과 ‘신’을 하사하셨지요. 여기서 저는 임금께서 공의 전문지식을 깊이 신뢰했음을 느꼈습니다. 또한, 공을 지극히 아낀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다 공의 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공은 평생 40여 차례나 일본 등지를 드나들면서 667명의 소중한 조선 백성을 쇄환하셨습니다. 공이 74년의 일생을 일구셨으니, 거의 매년 험한 길을 떠나셨던 게지요. 처음엔 아전으로서 주인을 섬김과 동시에 어미를 그리는 마음에서 그랬지만, 관록이 쌓일수록 공은 오히려 백성을 최우선에 두고 거동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어디서 그런 열정과 애정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내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견, 참으로 대견합니다.


四. 계해약조의 체결 - 평화와 안정을 조선에 선사하셨습니다.

태조 임금으로부터 세종 임금까지 60년간 184회의 왜구 침입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조선의 땅이 피로 물들고, 곳간은 강탈당하였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요. 선대 임금들의 노력과 특히, 공의 노력으로, 잡혀간 포로 중의 일부가 돌아왔으나 그것은 결국 ‘호구지책’일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길은 연안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니까요.

양란 전까지 조선은 강대하였고, 그리하여 대일 외교 정책은 늘 강경노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정책일 뿐, 수면 아래에서는 긴밀한 외교적 조율이 있었지요. 그 핵심에 서 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충숙공 아니십니까. 43년간 무려 40여 회나 일본 등지를 드나들면서 원칙과 강경책을 고수하면서도 때때로 기지와 책략을 발휘해 회유책을 써서 대일 외교 일선을 장악하셨지요. 그러한 공의 노력으로 계해년(1443년)에 역사적인 ‘계해약조’가 체결되니 놀랍지 않습니까.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을 원하는 선박은 문인(文引)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여 조선 초 대일관계 안정에 기여하셨습니다. 공은 왜인들의 체류문제와 입국(도항)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 체계를 구축하셨습니다. 계해약조의 체결 이후 왜구의 침입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이리하여 공의 노력은 남해안, 대마도 일대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五. 전문외교관이시며 후대에 귀감이 되실 충숙공

금년, 8월 29일. 통탄할 일이 벌어졌지요.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국권이 강탈(强奪)당하고 이 땅은 왜인들의 점령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더 이상 선린의 관계가 아닙니다. 공의 은혜를 잊고 임진란을 일으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어놓더니, 그 야욕을 숨기지 못하고 또 그 흉악한 속내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 내부의 본연적 패악성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공이 만들어놓으셨던 평화 같은 것은 이제, 이 땅에 없습니다. 아비규환이 되어버렸습니다. 통곡의 시절입니다. 어디에도 충숙공 같은 명민하고 사명감 투철하여 애민의식이 철저한 사람이 없음이 참으로 슬픕니다. 나라의 녹을 먹던 치가 임금을 능멸하고 백성들을 적장의 손에 넘겼습니다. 조국을 통째로 적장에 수중에 넘겼습니다. 공을 기억합니다. 공은 달랐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적지로 투신하셨던 분이 공 아니셨습니까. 어미는 느낍니다. 어디선가 슬피 울고 있는 공의 모습을.

이 서간은 공에게 쓰는 편지이자 동시에 나라 잃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보내는 격서(檄書)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외딴 섬이 아닙니다. 대양 위를 표류하는 범선입니다. 지금 세계는 격랑 속에 있습니다. ‘지구’라는 거대한 대양 위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힘겨루기가 극렬히 파도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라는 범선은 이 파도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파되고 맙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과 같이 사명감과 국가관, 애민애족 정신이 투철한 전문외교관의 역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이 조국, 이 나라는 이제 충숙공을 본받아 하나, 하나가 모두 깨치고 실력 있는 외교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외교력을 길러야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六. 이제 서간을 매조지합니다.

그리운 내 아들, 충숙공. 누구보다 어미를 사랑했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공의 그 뜨거운 가슴. 그립습니다. 혹, 저 지상 어딘가에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신 것은 아닌지요. 이 민족은 언제나 공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깨우칠 것입니다.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