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퍼 나르기/공모전&투고

[2011]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타인의 방(투고)

* 2011년 12월, 동국대학교 교지 <東國>에 기고문을 싣다.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타인의 방

  6학기의 끝물이다. 대학 생활도 이제 두 학기 밖에 남지 않았다. 2006년, 우리 학교가 개교 백 주년 되던 해에 입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 목전이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난 대학생활 동안 무엇을 하여왔는가? 군 복무 기간을 합한다면 5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보다, ‘대학’은 내게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나는 지난 대학 생활을 정리하고, 좀 더 준비된 졸업반을 맞이하기 위해 그간의 보고서(과제)들을 모아보았다. 공식적인 입학(식) 전, ‘사전교육 시간’에 제출했던 보고서부터, 금번 학기 들어 제출한 전공 수업의 보고서 및 작품까지, 다양한 나만의 포트폴리오가 될 법했다. 누적된 보고서들은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했다. 공간적으로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산부터, 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렀고, 그 주제․생각의 깊이․장르․분량 등에서 종적으로나 횡적으로나 다양했다.
  정리하면서, 궁금해졌다. 이 편린 같은 보고서들을 꿰뚫는, 어찌 보면 지난 5년 간 내가 사유한 것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고갱이’는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타자(他者, otherness)’였다. 기억의 소트(sort) 연산을 돌려보건대, 기표이든 기의이든, 모든 보고서는 ‘타자’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첫 보고서였던 ‘사전교육’의 그것은 표면적으로 ‘유전자 변형 식품(GMO)의 위험성'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강대국에 의해 ‘절대 타자화’되는 제3세계의 모습(오리엔탈리즘)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보고서는 ‘국내에서의 디아스포라(離散)’를 표면적 주제로 하면서도 대도시에 의한, 도시인들에 의한 지방에의 타자화에 대해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나는 타자를 체화하고, 무의식중에 그것을 문제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나’로 소급된다. 앞서 언급한 ‘GMO’의 문제나 ‘제3세계’는 거대담론적 타자의 문제이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서있는 ‘나’, 바로 ‘나’에게로 몰아드는 것이다.

*

  얼마 전의 일이다. 아침이었다. 등교를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던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려는데, 아이 하나가 불쑥 튀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는 놀랐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나도 적지 않게 놀랐다. 곱슬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볼 살이 터질 것 같은, 다섯 살 무렵의 남자아이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아이는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래, 안녕!”했다. 낯선 아이였다. 우리 층에 이런 꼬마가 살았던가?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낯선 아이였다.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것이 7년 전, 그 7년을 모두 거슬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이에 대한 기억은 도무지 없었다. 물론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겠지만, 역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고, 물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이사를 왔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나는 물었다. “몇 살이니?” 아이는 무엇이 그렇게 신났는지 싱글벙글 웃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했다. “저번에 저랑 인사했잖아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놀랐다. 나는 생면부지의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이랑?”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인사를 했다면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혹시, 꼬마야. 우리 옆집에 사니? X02호?” 아이는 “네!”하더니 “작년에 이사 왔어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부연한다. 작년. 1년이 지났다는 말인가. 그런데 난 아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아이와 나눈 인사마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이는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서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7년을 살았지만 그 동안 옆집에 사람이 살긴 하는지, 산다면 누가 사는지, 주인은 몇 번 바뀌었는지, 몰랐다. 이것이 ‘익명성’인가? 현대 문학작품 속에서 그토록 누차 반복하던 그 ‘비극적 현실’인가? 나는 생각했다. 우리 집과 옆집의 거리는 불과 ‘벽 하나’ 정도. 한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반대쪽에서 들릴지도 모르는 거리다. 그런데 이토록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입구에 멈추어 섰다. 컴퓨터 본체 같은 차갑고 거대하고 각진 덩어리들이 도열해있었다.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수 십 수백 개의 네모난 불들이 컴퓨터 본체의 엘이디처럼 반짝였다. 엄청난 수였다. 불빛과 불빛 사이에는, 상하좌우 서로가 서로를 맞댄 그 불빛 사이에는, ‘틈’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미세한 틈에 가로막혀 옆집에 사는 아이마저 알지 못했다는 말인가? 끔직했다. 너무 오래된 문제제기라 ‘문제’라는 의식마저 하지 않는 그 현실이, 새삼 끔찍해졌다.

 최인호의 단편소설 「타인의 방」(『문학과지성』3호, 1971년 봄)은 이미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질을 간파하고 있었다. 오랜 출장을 다녀온 ‘나’는 이웃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나’는 아파트에 3년을 살아왔는데, 이웃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강도 취급’을 한다. 물론 ‘나’가 ‘이웃들’을 알아보지 못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아니 뭐라구요?”
  그는 튀어 오를 듯한 분노 속에서 신음소리를 발했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래 이 집 주인을 당신 멋대로 도둑놈이 강도로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나두 이 집에서 삼 년을 살아왔소. 그런데두 당신 얼굴은 오늘 처음 보오. 그렇다면 당신도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소?”

(「타인의 방」, 『20세기 한국소설 - 최인호․박범신 외』p.16, 창비)

  무한한 타자화(他者化)이다. 나에게서 네가, 너에게서 또 다른 네가, 또 다른 너에게서 또다시 다른 너에게로 타자화가 진행되는 ‘무한 타자화’의 도미노이다. 틈이, 틈이 자꾸만 벌어진다. 40년 전에 쓰인 「타인의 방」은 이미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극을 예언하고 있었다. 내가 꼬마를 알아보지 못한 것, 내가 죄책감을 느낀 것. 나는 극구 부정하더라도 결국 나 역시 근대성의, 현대성의 바다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숨을 쉬어야겠다, 생각했다. 하굣길에 바라본 아파트, 그 무수한 ‘타인의 방’들은 새삼스레 나를 각성하게 했다. 나는 지금껏 무호흡으로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실은 죽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엘리베이터에 다시 오르다 다리가 풀렸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 것이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삼면은 거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췄다. 서있는 나의 뒤로 무수한 ‘나’가 중첩되고 있었다. 저 너머에 서있는 나는, 나인 것인가. 나는 거울에 바투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찼다. 입김이 희게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저 안에 서있었다. 저 안에 서있는 나는 도대체 ‘나’인가?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나에게, ‘나’라는 존재 역시 타인이 되었다는 것을. 나 역시 타인의 방, 그 중에 하나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

  1970년대 이후, 많은 심리학자들이 ‘우울의 리얼리즘(Depressive realism)’이라는 것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학자는 앨로이Alloy, 에이브람슨Abramson, 돕슨Dobson 그리고 프랑슈Franche 등이다. 그들이 주창한 ‘우울의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자존감, 평판, 통제 위치, 능력’ 면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은 현실감각을 지닌다.”라는 것. 가설일 뿐이지만, 이 명제가 함의하는 진실―일 가능성을 지닌 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두려워진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린다.”

  이 가설 속에서 희망, 꿈, 웃음이란 일거에 위선으로, 작위적인 것으로, 허위의 것으로 추락하고 만다. 사람들은 우울증을 피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며, 그 방법으로서 희망, 꿈, 웃음 등을 ‘이용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의 보고서를 정리하며, 나는 단순히 그것이 수업의 객관적 결과물 혹은 성과가 아님을 직감했다. 보고서들은 ‘나의 정신’을 가늠하는 일종의 ‘지표’였으며, 현실을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가 되면서, 동시에, 아주 역설적으로, 우울에로의 추동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희망, 꿈, 웃음 등의 허위가 벗겨지고 그 알맹이가 설핏설핏 보인다는 것은 결국, 우울의 한 징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꿈을, 웃음을 말하고 싶다. 이 ‘거울에 비치는 거울’처럼 복잡다단한 세상이 ‘한 꺼풀’에 그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 따위의 것을 벗겨낸 자리에 현실이 있다면 그 현실의 벗겨낸 자리에는 또다시 희망, 꿈, 웃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조차 허위의식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야하겠으므로, 생은 여전히 나에게로 흐르고 있으므로, 그 무한한 타자화의 세계를 헤치며 걸어야 하겠다.■('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