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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퍼 나르기/공모전&투고

[2011] 나를 진정으로 채우는 것(공모전)

2011년 10월, 구상한강백일장에서 가작을 받다. 총 5시간이 주어졌고, 1시간 반만에 쓰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나를 진정으로 채우는 것
- 허기에 관하여

 

가을은 내게, 밥이며 독서의 계절이다.

선인들은 천고마비라 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 지독히도 함축적인 시어와 같다. 거대한 순리가 이 네 글자 안에 있다. 말은 살찌고 순리는 그러하니 나 역시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을이란 것, 내 발치에 닿으면, 저절로 내 식욕을 돋우는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순리는 지고하고 보편적이며 어김이 없다.

또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어릴 적, 나는 이것이 의문이었다. 천고마비의 순리와 독서의 연관성이 가늠되지 않았다. 답은 누가 내 손에 쥐어 준 듯 찾아왔다. 사춘기 시절이었다.

지독히도 우울하던 시간들이었다. 모든 것이 권태롭고 따갑고 그래서 치기 어리던 시절, 교과서가 싫어진 나는 그 이외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절정은 고1이던 해의 가을이었다. 그해 가을은 유독 단풍이 짙었으며, 배가 고팠고, 밥을 챙겨 먹은 뒤에는 끝 간 데 없는 나른함이 몰려왔다. 그 나른함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취기(醉氣)’와도 같은 것이었다. 주정은 독서였다. 열에 들떠 한바탕 독서를 하고 나면 배가 고팠고 밥을 먹었으며 다시 책을 읽었다. , 그것은 나의 유일한 책갈피였다.

가을은 내게, 밥이며 독서의 계절이다. 그것은 해열제였고, 해방구였다.

성인이 된 이후 내겐 어떠한 치기도 권태도 편집증적 독서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식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책을 읽었던 그날들의 우울과 절연히 결별하였다고 생각했다. 눈은 활자를 잊고, 손은 종이의 질감을 잊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군 입대 전의 믿음이었다.

군대는 허기의 공간이었다. 6시 기상-10시 취침의 그 동일하고 정형화된 일상은 매 순간 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매 식사시간마다 나는 사회에서보다 그 배 이상 많은 양의 밥을 먹었다. 그래도 허기가 졌다. 부대매점 출입이 가능해진 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밥을 대신할 간식을 찾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몸이 밑 빠진 독이 된 것 같았다. 허기가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의문은 쌓이고 쌓였다. 내 허기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하릴없이 일상에 끌려 다니면서도 심지어 밥을 먹고 있는 순간에도 의문은 뇌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가을이 왔다. 그해 가을은 내가 병장으로 진급 하던 해였다. 날카롭고 매사 차갑던 간부 하나가 축하한다며 작은 케이크 하나와 소설책 한 권을 건넸다. 나는 그때 무언가 단단한 것이 내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다시, 사춘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없이 우울하고 허기지고 열렬한 독서가 있던 시절을!

나의 허기는 비단 식욕만은 아니었구나.”

그것은 마음의 헛헛함이었다. 폐쇄된 공간과 그 안의 무수한 인간관계가 나를 공허하게, 허기지게 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허기, 자유로움에 대한 허기, 나 자신에 대한 허기였던 것이다.

나는 전역할 때까지 다시 독서에 빠져들었다. 밥이 채우지 못하던 텅 빈자리에 활자들과 그 행간에 있던 무형의 존재들이 들어왔다. ‘밑 빠진 독에게 구원의 두꺼비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가을이 무르익었다. 전역을 한 지도 2년이 다 되었다.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1년 동안 일을 했고 그리던 학교로 복학을 했다. 나날이 행복한 시간들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허기지지 않는다. 다만, 독서에의 열정이 주춤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상기한다. 또다시 찾아온 지도 모를 공허함을 상상하며 되뇐다.

가을은 내게, 밥이며 독서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