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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퍼 나르기/공모전&투고

[2012] ‘알바’는 떠납니다(투고)

* 2010년 5월에 '직장문예대상'에 응모한 글이, 2012년 3월 호 <행복한 동행>(좋은생각)에 실리다.

‘알바’는 떠납니다
 
  나는 알바입니다. 이름도 없이 ‘알바야’라고 불리는 알바입니다(물론 퇴사를 앞둔 지금이야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군 전역하고 학비 구할 길이 막막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자니 이미 쌓인 빚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시작한 일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명목상 ‘사무보조’라고 하지요. 말이 좋아 사무보조이지, 사실 택배 기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택배 기사님들을 폄하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일을 하며, 택배 기사님이나 우체부 여러분이 얼마나 고단한 일과를 보내고 있는지 절감했습니다. 정말 절감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저는 내내 잠을 잡니다. 하루 종일 걷고, 뛰면 몸은 잠을 애타게 요구하더군요. 고작 반나절밖에 일을 하긴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앉지 못한 채 걷고, 뛰는 날이 태반입니다. 어느 날은 같은 사무실 여자 직원에게 이렇게 푸념한 적이 있습니다.
  “발바닥을 사포로 문지르는 거 같아.”
  그녀는 제 푸념을 그냥 농담 정도로 치부하더군요. 그녀가 배꼽을 잡고 웃더라고요.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여 전사’입니다. 스무 살 때부터 ‘정직원’이었고, 사무실 밖에서 일해 본 적이 없기에, ‘알바’라는 게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특히,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고 적어도 스물일곱 살은 되어야 졸업한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모양으로 종종 농담조로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오빠, 다음 알바는 나보다 동생이 왔으면 좋겠어.”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오빠’를 부리기가 그래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녀는 모르겠지요. 나이 어린 동생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오빠’의 심정을요. ‘알바’는 그저 수동적 존재이자, 도구입니다. 제가 만약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견뎌내지 못할 자존심에의 상처가 많이 나는 자리이지요. 지금도 수많은 제 또래 친구들이 어딘가에서 자존심 깎아가며 ‘알바’를 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어쩌면, ‘알바’는 이 시대 청년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인지도 모릅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어디 대기업 회장 손자나, 페이스북의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의 경우라면 조금 예외 이려나요. 그러나 세상 90%를 차지하고 있는 ‘소시민’의 자식들,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들은 그 예외에 속하지 못하겠지요. 저는 그 대다수에 속합니다. 그렇기에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 아까운 생각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공부 좀 해서 대학에 들어간 여러 ‘예비지식인’들이 단지 ‘돈’ 때문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지난할 시절을 ‘허비한다.’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좀 가슴이 아프네요.
  누군가 우리 세대를 들어, X세대도 아니고, N세대도 아니고, ‘88만 원 세대’라고 했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우리 ‘88만원 세대’를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가 된다.”라고 쓰고 있더군요.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에게 민주화 이전처럼 투쟁해야 할 뚜렷한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무시무시한 ‘학비’의 실재이니까요. 당장 학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제적’ 당하고 말 테니까요. ‘학위’는 소위 말하는 ‘스펙’ 목록에도 끼지 못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된 시절 아닙니까. 그 기본을 유지하고자, ‘품위’를 유지하고자, 우리 88만 원 세대는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중언부언, 횡설수설의 넋두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래요, 저는 여전히 알바입니다. 이제 곧 지금 이 알바를 시작한 지 1년이 됩니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대략 2달 정도 남았군요. 다행히도 요즘은 알바도 4대 보험 가입이 의무적이라, 퇴직금 조로 ‘+알파’의 월급을 받아 등록금에 보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대 보험.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야금야금 보험료로 받아가는 그 금액들이 아까운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만족해야겠군요. 퇴직금이 나오면 기분이 조금 좋아질 것도 같습니다.
퇴사를 앞두자니, 직원들이 응원의 말, 한마디씩 해줍니다. 세일즈를 하는 분들이라 그런지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대기업 직원은 ‘깍쟁이’ 같다는 편견을 깨주신 분들입니다. 아니, 선한 의미의 ‘깍쟁이’라면 이분들을 칭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사무실에 전임 오시자마자 ‘애니메이션’을 보며 제게 말을 건네시던 과장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요즘 무슨 소설책 읽어? 나는 요즘 돈 관련된 책들만 읽어. 사람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거 같아.”
  그래요. 과장님 파이팅.
  그리고 너무나도 친절하신 팀장님의 말씀도 생각나네요.
  “내가 영업한지 20년은 된 거 같은데, 언젠가는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걸렸어. 발바닥에 염증이 생기는 건데, 집배원 아저씨들이 걸리는 병이래. 내가 그만큼 걸었나봐.”
  너무도 담담하게 말씀하시던, 팀장님도 파이팅.
  여러분, ‘알바’는 떠납니다. 알바는 고단하고 ‘품위 없는’ 일임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전 느꼈어요. 제가 푸념하기엔 여러분이 너무 열심히 사신다는 걸. 반드시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걸. 아, 이렇게 말하니 꼭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가 된”것 같네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매미는 수년을 땅속에서 와신상담하다 단 며칠을 찬란하게 산다는 것을 아는 저이니까요. 그 찬란함을 위해 저는 와신상담하렵니다. 여러분도 힘내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