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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의 사각형/생각들

그들의 사랑을 예수님이라고 들어줄까요.


잠시,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생각하며...

 

예수의 사랑이 위대한 까닭은

당신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당신 스스로 그 고난을 다 감내하시고,

빠스카의 어린양이 되시는

상상하지 못할 희생이었다.

 

요즘 개신교가 천대 받는 까닭은

예수가 보여준 이러한 위대한 사랑 아래
배타, 차별, 편협의 이기적 쾌락과
돈, 명예, 권력, 섹스 같은 온갖 쾌락은 끌어안고서도
정작 희생은 내려놓고

모른 척하기 때문 아닐까 싶었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 아닌가.

 

희생이 없기 때문에

손에 쥐고 '내 것'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그 태도 때문에

이 세상이 개신교를 더러
음악, 연애, 돈 거기에 도덕적 해방감이 있는
친교의 장, 커뮤니티, 폐쇄적 공동체라 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를 따른다는 것.
그러나 요즘 개신교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 헌금 내는 것' 정도가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지나치게 '작게' 생각하는 건 아닐지.

 

물론 교회에 나가고 헌금을 내는 것도
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를

이 땅에 오시게 하는데에

작은 사도가 되는 일이겠지만

본질을 모르고, 알아도 못 본 체하고,
성경을 본체로 한다면서

정작 필요한 부분만 쏙쏙 빼먹는다면
결국 그것은 프로테스탄트가

종교개혁 때 목이 빠져라 주장했던
중세 가톨릭의 폐단으로 돌아가버린 격일 거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하고
그러려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
공허한 기도에 앞서 스스로

작은 희생을 준비하는 건 어떨지.
굶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

북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밥 한 끼 '거르는 것',

커피 한 잔 '참는 것',

내가 좀 속상해도 그 감정 잠시 '미뤄두고'

내 앞에 있는 '가족'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짖는

통성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조그마한 희생이라도 하나 하나 쌓인다면
매일 그 수많은 교인들이 그와 같이 한다면
하늘나라는 이미 이 지상에 내려와 있을 거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바로 예수를 사랑하는 일인데
가족, 이웃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이 세상에 날선 독설로 흠집을 내면서도
교회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목청 높인다면
그 목소리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그 관념적인 사랑, 실체도 없는 사랑을,
예수, 그 분이라고 들어줄 것인가.

 

예수, 그 분은 한없이 인자한 분이지만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는

채찍도 휘두를 줄 알았던 분이다.

과연 그 채찍 앞에

오늘의 개신교는 당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