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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매혹적인 환멸의 세계 - <환상수첩>(김승옥)

1960년대 최고의 소설가 '김승옥'

어느 날 밤, 나는 죽음을 노래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어둡고 습한 곳으로 침잠하려 했는지, 나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게 아주 고통스러운 까닭에서 비롯되는 것. 그것이다. 그것만은 선명하게, 형언할 수 없는 무엇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죽인다는 뜻의 '자살'은 대개 환멸에서 비롯된다. 세상에의 환멸이든, 신에 대한 환멸이든, 사람에 대한 환멸이든, 그 무엇에 대한 환멸이든-결국 같은 맥락일 수 있지만- 환멸이란 소소한 조각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죽음에로의 충동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여기, 그 환멸의 한 가운데 선 주인공들이 있다.

소설가는 그들을 어떻게 키워냈을까. 아주 교조적으로 살아야 한다, 는 잠언을 역설할 것인가? 온갖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결국엔 인간승리한다는, 그런 성공신화를 기록할 것인가?

작가 김승옥은 놀랍게도 희망의 끈을 놓는다. 표제를 '환상수첩'이라 하여, '이것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올시다.'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그는 작품에서 내내 "퍽 가깝게 지내던 친우의 '소설 형식으로 된 수기'"를 빌려 지독한 환멸을 노래한다. 그럼으로서 환멸은 뚜렷해진다. 우울과 환멸이라는 것들을 어설픈 희망으로 품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소설다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교조적이 되는 순간 소설은 소설답기 않기 때문이다.

무릇 현실이란 직시할 때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세상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는다. 그러나 세상을 직시하고, 그것의 어두움을 바로보아야만 비로소 이해하고 치유 받을 수 있다. 자꾸만 어설픈 희망으로 자신의 아픔과 우울을 감추면 오히려 상처가 덧날 뿐이다. 세상을 지독하게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까닭이다.

특히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초래된 '인간 상실', '인간 소외'의 문제는 더 이상 사회제도가 해결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설의 기능은 본래적으로 사회의 그것과 반하여 '인간 실존'을 부각하는데에 있다. '환상수첩'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여, 바깥의 시선이 내부의 시선에 거리두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내부의 시선 즉, '현실에의 직시'에 있었던 것이다. ■('1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