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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사각형/책을 벗기다

[서평] 어느, '자살자'의 유서 -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일본 근대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소설'(私小說)이다. 사소설은 서구에서 낭만주의 이후 유행했던 '자연주의(사실주의)'의 일본식 변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변형된 일본식 자연주의는 원류에 비하더라도 한층 더 침울하고 기이한 문체를 구성해낸다. 그 점은 아마도 일본의 독특한 문화색 때문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은 이러한 '사소설'계의 작품 중 대표격이다. 특히,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이 소설을 더욱 주목 받게 했다. 이 소설을 발표한 직후 작가가 자살을 했기 때문에 <인간실격>이 일종의 '유서'로 해석된 것이다.

일본의 '사소설'은 자연주의의 일반적 경향에 따라 인간 본연의 감정(특히, 성욕이나 우울 등과 관련된)을 적나라하게, 극단적으로 끄집어내고 그것이 환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그린다. 그러나 '사소설'이 독특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 색체에 덧입혀, '작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과 합일되어 대개 '비극적 운명'을 산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자연주의도 '작가'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그것은 유럽과 조금 다르다. 까닭은, '자살'에 있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에서 '자살'은 여타 다른 나라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다소 '긍정적 의미'라고나 할까,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향수(여담이지만, 사무라이들이 일본 열도를 장악했던 약 300여 년 동안 '할복자살'로 죽은 이는 고작 3명 내외였다고 한다.)라고나 할까, 아무튼 일본에서의 '자살'은 '부정'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문학가로는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스 흡입), 그의 제자 미시마 유키오(할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수면제 과다복용) 등이 있다. 후에 이런 '사소설'적 경향은 한국 근대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1930년대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배경지식을 모두 떨쳐버리려고 한다. 본래적으로,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만약 '사소설'이 '소설적 본질'을 망각하고 개인적 비망록에 그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읽히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소설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나동그라진 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인물을 통해 투영되는 메시지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실격>의 독법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개인적 '유서'로써 국한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소설'이라는 대의명제를 기초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느 독자들이 후기에 쓰는 바와 같이 읽고 싶지는 않다.

이곳은 어디로 가는 샛길인가? ここはどこの細道じゃ?

ここはどこの細道じゃ?(pp.337) 옮긴이 '송숙경' 씨는 '여기는 어디 있는 오솔길이냐?'라고 번역했는데, 내 생각엔 '이곳은 어디로 가는 샛길이뇨?' 정도가 더 원어의 뉘앙스에 맞고 자연스럽지 않나 싶다. 일본의 건널목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동요(通りゃんせ)'에 나오는 구절이다. ここはどこの 細通じゃ 天神さまの 細道じゃ~하는. 작가 생전에도 흔히 불려지던 동요였던 모양이다. 유튜브에 찾아보니 자료가 있다.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를 애잔함 혹은 비장함 혹은 기묘함 따위가 밀려드는 곡이다.(저작권 관계로 링크해놓았던 유투브 자료가 삭제 된 것 같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곡조가 화자의 심적 상태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 요조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징후발견적 독해'라는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동요의 한 구절만 발췌해 실은 이 부분이 화자의 '진짜' 심정이라는 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옮긴이도 그 점을 고려해 일본어 원음 그대로 적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구절이 발췌된 '동요'의 내용은 다소 음산하다. 그 깊은 뜻(?)은 자세히 모르겠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다.

通りゃんせ 通りゃんせ
지나가세요 지나가세요


ここはどこの細通じゃ
이곳은 어디로 가는 샛길이뇨
天神さまの 細道じゃ
하느님께 가는 샛길입니다

ちっと通して下しゃんせ
좀 지나가게 해주세요
御用のないもの通しゃせぬ
볼 일 없으면 지나갈 수 없습니다

この子の七つの お祝いに お札を納めに まいります
이 아이의 일곱번 째 생일에 부적을 주러 갑니다
行きはよいよい 帰りはこわい
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돌아오는 것은 힘들지
こわいながらも 通りゃんせ  通りゃんせ
힘들어하면서 지나가세요 지나가세요
출처 : 번개와 피뢰침 님 블로그(http://pyrechim.egloos.com/1343314)

주인공 요조의 심정은 이렇게 드러난다. 그는 아무도 없는, 길섶엔 오직 '낭떨어지'뿐인 조붓한 샛길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기록은 보기에 따라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작은 것에 절망하고, 큰 것에 포기한다. 소위 '정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들의 시선엔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고, 나의 잣대로 남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 그 정도를 잴 수 없다. 오로지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고통을 헤아려야만 한다. 동시에 '정상적인 삶'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행복'으로 '불안'을 위장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최근 최윤희 씨의 자살을 목도한 어느 분의 말처럼, '행복한 척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내면의 습하고 어두운 부분을 긍정하고, 남의 작은 부분까지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기에, 요조는 행방불명이고, 다자이 오사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마, 요조가 원했던 건 오직 '이해'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조의 생은 "거부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으며, 그는 언제나 "권유 받고도 거부하면, 상대방의 마음에도 나의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쌀쌀맞고 냉정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의 위협"을 느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만약 그 공포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요조는 그런 추레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건대, 다자이 오사무도 그걸 원했지 않을까. ■('10.10.14)

<"나의 불행은 거부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p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