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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의 사각형/CM Review

[광고논평] 그래도 다행입니다, 맥심이 있어서 <맥심 : 커피라는 행복 편>

아인슈타인의 예언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미래 사회에 대해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I fear the day that technology will surpass our human interaction. The world will have a generation of idiots." 해석하면,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세대가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이 예언이 실현되는 현장들을 똑똑히 보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스마트폰, 지하철에서 이동할 때도 스마트폰, 심지어 샤워를 하다가도 스마트폰, 공원에 애완견과 산책을 나가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익숙한 풍경들 아닌가? 가만히 낙엽 지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마트폰 액정'이라는 손바닥만한 창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들 아니, 바로 당신 말이다.

스마트폰의 창은 혼자만의 창이며, 그러므로 소통의 부재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가 있지 않느냐고? 그런 것들이 도리어 소통을 원할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자.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스마트폰은 소통을 위한 보조도구이지, 절대 그 자체가 소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결국 우리가 소통해야하는 상대는 스마트폰 너머의 실체 없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먹고 마시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란 걸.



생각의 상실, 사유의 부재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곱씹어 보자. 그의 "세상은 천치들의 세대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말이다. 스마트한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역설적으로 '백치화'이다. 모든 사람이 스마트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면서도 결국 역설적으로 백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맥심 : 커피라는 행복 편>에서는 말한다. "세상이 스마트해지는 사이, 친구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렸습니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주요한 친구와 가족들의 전화번호, 집 전화 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그건 단지 암기의 문제가 아니라 '소중함'의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1, 2, 3, 4... 단축버튼 혹은 즐겨찾기 번호 하나면 충분하다. 그뿐만 아니다. 수첩에 펜으로 꾹꾹 눌러 기록하던 인류의 소중한 관습은 스마트한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라지고 있다. 이른바 '바보상자'라고 불리던 텔레비전은 아예 DMB라는 이름으로, 손바닥 위로 올라와버렸다.



손바닥 안의 세상에 눈을 빼앗기더니 생각마저 빼앗겨버린 건 아닐까요?
<맥심 : 커피라는 행복 편>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 누구라도 한 마디 해줬어야 하는 상황에서, 맥심은 시의적절하게 문제제기를 해줬다. 그러므로 "손바닥 안의 세상에 눈을 빼앗기더니 생각마저 빼앗겨버린 건 아닐까요?"는 <맥심 : 커피라는 행복 편>의 물음(문제제기)은 대답 이전에 공감대와 깨달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고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맥심이 있어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생각해봅니다, 내 생각이라는 녀석은 잘 지내고 있는지." 결국 회귀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마트한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 지혜로운 인간)으로서의 전통은 포기하지 말하야 하며 그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한다. 회귀의 매개는 다른 아닌 '맥심 커피'다. <맥심 : 커피라는 행복 편>은 맥심 커피 한 잔 하며, 스마트한 시대에 '잠시' 역행하는 아날로그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인류의 본질에 있어서만큼은 그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다. 광고는 말한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맥심이 있어서."

그래, 다행이다. 보편적인 문제를 광고 전면에 내세우고 커피 한 잔 권할 수 있는 광고가 있어서, 비록 판매를 목적으로 할지라도, 다행이다. 마지막 카피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커피라는 행복, 맥심."